근본적으로는 보수주의자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로쟈

로쟈 님이 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하여를 읽었다. 얼마 전에 지곡에게 이야기하던 것이 겹쳐서 굉장히 흥미롭게 들린다.

“얼마 전에 나는 아는 분과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진보적인 성향인 그분이 서비스 종업원에게 취한 태도에 나는 조금은 실망했었다. 서비스를 구입했다고 해서 종업원의 웃음이나 상냥한 태도까지 구입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서비스를 구입하므로써 그런 것까지 같이 구입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인데.” 이 말을 지곡에게 하면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너무 민감한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 또한 이런 점에서 별로 민감하지 못하다.”라고 덧붙였다. 나 자신이 민감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로쟈 님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적당히 인간적인 서비스’를 원할 뿐, ‘서비스 없음’을 원하지 않는다.

로쟈 님의 말대로 나 또한 이것을 ‘모순형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딱 이 정도만을 바란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기는 쉽지가 않다. 아니, 꼭 상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환상에 언제까지나 취해있고 싶은 것이다. 적당한 변화, 적당한 개혁, 적당한 진보.

일전에도 몇 번 내가 좌파가 아닌 이유에 대해 설명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글도 그 글들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좌파라고 고문당하는 일도 사라진 요즘에, 내가 굳이 좌파가 아닌 이유를 집요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명박 독재’라지만 동시에 ‘좌파’라는 단어가 뭔가 패션 소품처럼 느껴지는 시대이고, 그런 점에서 내가 남들에게 좌파라고 여겨지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착각을 피하기 위해 내가 좌파가 아니라는 말을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적당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정도가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는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덧붙임.
아, 새해 아침부터 왜 이리 폼잡고 80년대 풍의 글을 쓰고 있는거야, 나도 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