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전망의 부재 :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청소년 운동’이 필요하다

아수나로엔 어떤 장기적 비젼이나 목적 따위가 없었다. … 그들은 현 사회 상태의 문제에 대해 그 원인조차 제대로 모른다. … 또한, 그들은 단순히 거부한다는 그 목적 자체 조차 제대로 수행할줄 모른다. 시위나 행사 따위를 하면 바뀔줄 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고나 있는걸까? 내가 보기엔, 그들은 전례에 시위나 행사 따위를 통해 바뀐게 있기 때문에, 오늘날 지금도 그럴줄 알고 그렇게 행하는듯 싶다. 그러나, 과연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보았는가? 왜,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내가 보기엔, 이것들은 비둘기 미신과 같다. 그들은 원리 조차 모르며, 자극->반응 순으로 근거 조차 없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나선, 아수나로를 떠난 이유, 나선의 천국 2011-03-19.)

…이번 “실종신고” 집회는 그토록 많은 품을 들여 홍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집회 참가자가 100여 명에 그쳤으며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다수가 이미 아수나로나 다른 단체 등에서 활동을 하던 청소년들이었다. 집회 분위기는 좋았지만 과거의 청소년 거리 집회들처럼 미조직된 청소년들 상당수가 나오는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결국 이번 집회는 청소년운동이 앞으로 조직력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교훈을 준다.

(공현, “청소년 집회 “실종신고”에서 본 청소년운동의 현재”, 인권오름 2011-03-23.)

‘실종신고’ 집회 날, 아수나로 인천지부에서 활동했던 나선이 아수나로를 비판한 글을 블로그에 발행했었습니다. 조야한 수준의 유심론 ((세계는 정신적인 근원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학설.))적인 생각에 동의가 안 되긴 하지만, 나선의 아수나로 비판이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핵심을 짚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인권 문제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요? 청소년 인권이 보장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위를 하면 청소년 인권이 보장 받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청소년들이 시위를 하면 꼰대들이 ‘쫄기’ 때문에? 그렇다면 많은 청소년들을 어떻게 하면 모을 수 있을까요? 많은 청소년들이 모이지 않을 때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직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인권오름>에 실린 공현의 집회 평가글에서 저는 무언가 큰 한 가지가 빠져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분명 “청소년운동이 앞으로 조직력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고 언제나 “당연한 교훈”이었기에, 더 이상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분량의 한계 상, 그리고 글의 성격상 ‘어떻게’를 담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집회 평가 회의에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자세한 이야기가 그리 자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듭니다. “아수나로에서 거리시위나 어떤 행동을 만들 때 이 행동에 친구들을 한두명이라도 데리고 참여”한다거나, “학내행동들을 작게든 크게든 조직”한다거나, “아수나로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공부모임을 하고 토론회를 열 때 참여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인식을 공유”하는 정도가 생각해볼 수 있는 전부이겠죠(공현, “청소년인권운동/아수나로 비젼 러프스케치”, 창틀에 걸린 꿈들 2010-06-08.).

이는 아수나로에 잘못이 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조직화가 안 되는 판”에다가 “’대중’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경로들이 매스미디어와 거리선전 등 외에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공현, “조직의 부재 :: 여하간 문제는 조직화다”, 창틀에 걸린 꿈들 2010-02-15.).

혁명 전에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들은 남성 노동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날마다 13~14시간씩 일했고, 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잤다. 러시아는 여성을 끔찍하게 천대하는 사회였다. 아내 구타가 어찌나 만연했는지 부부가 함께 쓰는 침대 위에는 어김없이 채찍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양성 평등을 역사적 의제로 제기했다. 레닌은 “여성이 혁명에 얼마나 참여하는가가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다” 하고 말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끔찍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투쟁의 맨 앞에 섰다. 마침내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러시아 여성의 권리는 당시 어느 서방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 신장됐다.

혁명 첫 해에 여성 선거권 완전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전면적인 유급 출산 휴가제 도입을 공포했다. 낙태 합법화로 무료시술이 제공됐다. 부부 중 한 쪽만 원해도 이혼이 가능해졌고 동성애와 간통을 범죄로 다루지 않게 됐다.

러시아에서 배우자 일방의 요구에 의한 즉시 이혼이 가능한 것이 사실이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트로츠키는 “아직도 즉시 이혼이 가능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그런 정책들은 지금 기준으로도 급진적인 법과 제도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성들이 계속 가정에 붙들려 있는 한은 진정한 여성해방은 불가능했다. 여성 억압을 유지하는 전통적 가족 제도의 경제적 토대를 허물어야 했다. 가족 상속권이 폐지됐고 가사노동을 대신하기 위한 분만원, 교육시설, 공동식당, 공동 세탁소 등이 세워졌다.

1919~20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전체 인구의 90퍼센트가 공공급식을 이용했다. 공동세탁소와 보육시설이 마련된 질 좋은 공공주택은 여성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이예송, “러시아 혁명이 보여 준 여성해방의 가능성”, 맞불 34호 2007-03-07.)

여성 차별, 억압은 계급 사회와 밀접한 관련

러시아 혁명 이후 여성의 권리가 엄청나게 신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여성 차별이 계급 사회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엥겔스가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계급 발생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 것이나,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의 반(反)혁명으로 패배하고 국가관료가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부상한 후 여성을 때리는 채찍이 부활하고 여성 차별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 차별, 억압 또한 마찬가지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억압 또한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 ((특히 자본주의. 청소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 들어서 생겨났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충실히 일할 노동자를 생산해내기 위해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율과 이에 대한 순응을 가르칩니다. 학벌 사회는 졸업 학교 간의 위계로 노동에 대한 보상이 다른 것을 합리화 시키고, 노동 계급을 분열시킵니다. 학교에 두발복장규제와 체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입시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여성 해방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 계급 사회 철폐가 청소년 해방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 성공 후 1918년에 시험제도가 폐지”되었고, “모든 학교에 남녀공학제도가 도입”됐습니다. “12세 이상의 학생 대표자는 학교당국에 고용된 노동자 대표들, 교육인민위원회 대표자들과 나란히 교육 과정과 학교 운영에 대해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짐처럼 부여되던 숙제가 없어졌고,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성가신 존경의 표시를 해야 할 의무에서 해방됐”으며, “학생과 교사는 동지적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대학 수업료와 함께 학위증서도 폐지됐”습니다(강철구, “러시아 혁명 때 꽃핀 대안적 교육의 실험”, 저항의 촛불 11호 2008-11-03.).

물론 청소년에 대한 억압은 각 나라의 상황 및 투쟁의 역사에 따라 조금씩 그 양상이 다릅니다. 하지만 계급 사회의 폐지 없이 완전한 청소년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청소년 인권 중 ‘학생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썼는데, 다른 청소년 인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청소년 인권이 잘 보장되는 나라에 속하는 프랑스나 핀란드에서도 경쟁이 존재합니다. 프랑스에는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꼴’이 있고 이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며, 핀란드 또한 좀 더 나은 노동 보상이 보장되는 특정 학과에 학생들이 몰려 경쟁합니다. 학생들에 대한 억압적 규제 또한 존재합니다. 지난 2009년에는 프랑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무릎 위로 구멍난 바지나 옷을 금지시키도록 교칙을 개정”해 학생들이 반라(半裸) 시위를 벌이기도 했죠(Isabella Enock, “French students cry liberté over right to wear sexy clothes”, The Independent 2009-12-23.).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청소년 운동’의 필요성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에 대한 억압은 도처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 인권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전망과 사회 전체의 반자본주의적 변혁에 관심을 갖고,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물론 아수나로의 기본원칙에는 반자본주의적 입장이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아수나로 활동가들 중에는 반자본주의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요즘 저는 아수나로가 전반적으로 청소년 인권 운동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니까 청소년 인권 운동 같은 건 때려치우고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게 최우선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반자본주의적 변혁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되는 운동,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운동 ((이것은 때에 따라 청소년 인권 운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 비정규직 투쟁, 리비아 등 아랍혁명, 핵에너지가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청소년 인권의 보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당장 자본주의가 철폐되지 않더라도

물론 운동에 참여한다고 당장 자본주의가 철폐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운동의 성공은 사회 전체의 세력 관계,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또한 청소년 인권 운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공현도 ‘청소년 집회 “실종신고”에서 본 청소년운동의 현재’에서 지적하듯이, 2000년대 초중반과 달리 지금은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무척 줄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2000년대 초중반은 김대중-노무현이라는 소위 ‘개혁적’ 정권이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행동을 통해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반자본주의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자본친화적이며 여러모로 크게 개혁적이지도 않았던 정권과 지금이 이렇게 다른데, 만약 쟁점이 되는 운동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승리하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사회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민주당 정권을 당선시키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게 절대 아님을 강조합니다. 민주당은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는 점에서 결코 반자본주의적 운동의 고려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주장 또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청소년들 또한 자신감을 갖고 청소년 인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프랑스, 핀란드 교육을 만들어낸 것이 68혁명이었다는 점에서도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운동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8혁명은 교육 문제로 시작된 투쟁도 아니었고, 68혁명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교육 문제만을 제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전 반대라는 당시 세계 자본주의 내의 첨예한 쟁점으로 출발했고, 이후 천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파업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 과정에 위기가 왔고 혁명에 힘이 붙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혁명이 처음 시작된 프랑스와 독일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들에서도 세력 관계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 영향으로 프랑스에서는 대학이 평준화 되고 핀란드에서는 오늘날의 교육 체계가 자리 잡았습니다.

조직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중요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청소년 인권 운동의 조직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청소년 인권 운동이 당면한 일은 안하고 다른 집회나 가다니 청소년 인권 운동가로서의 관점이 없나 보다”는 등의 비판, 압력을 받으면서도 다른 ‘중요한’ 집회에 가는 활동가들에게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 활동가 누구나 청소년 인권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청소년 인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걸 느끼고 이런 공백을 메꿔줄 것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청소년이, 혹은 청소년 인권 활동가가 ‘청소년 문제’만을 느끼진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촛불 시위나 이라크 반전 운동 등에 청소년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런 운동이 성공하고 전체 사회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이 있을 때 청소년 인권 운동에 있어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과 같이 미조직 청소년들이 행동하기를 꺼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청소년 인권 운동을 인내를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다른 운동 또한 청소년 인권 운동에 적극 연대해야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이 정세 상 중요한 운동, 자본주의 권력에 핵심적으로 도전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운동의 사람들도 청소년 인권 운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적극 연대하도록 해야 합니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주장이 다른 운동에 확산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철폐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노동 계급 전체의 의식 변화 또한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문제는 청소년만의 힘으로’라는 의식적, 무의식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또한 이번 집회처럼 미조직 청소년들이 많이 와야 하는 경우, 다양한 운동(특히 교사, 학부모 등의 다른 교육 주체들)의 연대는 청소년들에게 청소년들만 청소년 인권을 외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다양한 사람들이 청소년 인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청소년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데 좀 더 확신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집회가 아수나로 단독 주최로 이루어진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물론 교사 단체나 학부모 단체 등이 잘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수나로가 이들을 거부해서가 아님은 잘 알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이들이 연대해줄 것을 호소하고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을 ‘잘’ 하는 것

요즘 저는 몇몇 활동가들이 “의지를 갖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하루 종일 운동을 하다가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매일 같이 하는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분명 이런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아수나로는 무척 성장할 수 있었고, 청소년 인권 운동이 한해살이 운동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경험과 논리를 축적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늘어나기만 하면 청소년 인권 운동이 잘 될 수 있는 걸까요? 물론 의지와 열정은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을 ‘잘’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점과 전망이 있을 때 운동은 ‘잘’ 이루어질 수 있고, 활동가들의 의지와 열정 또한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늘어날 수 있고, 조직력 또한 키워질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제대로 된 관점과 전망이 ‘자본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치적 청소년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구체적으로, 현대차와 홍익대에 이어 각 대학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투쟁, 아랍 지역의 혁명 지지, 핵 반대 운동 에 적극 참여하는 것일 겁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주최한 집회 <실종신고 : 제대로 된 교육과 학생인권을 찾습니다> 평가를 위해 쓴 글.

체벌금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

서울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이후, 여러 언론들이 연일 ‘추락하는 교권’, ‘무너지는 학교’를 말하며 학생의 교사에 대한 폭언·폭행 사건을 쏟아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체벌이 없으면 교권이 무너지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먼저 한 가지 사실관계부터 지적해보자. 조금만 유심히 이 기사들을 읽어본다면, 정작 이 사건들은 체벌이 금지된 서울·경기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언론들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체벌이 금지되지 않았던 2006년에 제작된 동영상까지 뒤져가며 열을 올렸다.

만약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언론들은 손쉽게 서울․경기에서 일어난 ‘교권침해’ 사건들을 무더기로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70% 정도의 교사가 체벌을 하고 있으며 20% 정도는 체벌을 ‘자주’ 하는(참교육연구소, 2010) 한국 현실에서, 0.1%나 될지 의문인 극소수 학생들이 교사에게 저지르는 폭력만을 부각시키며 학생 집단 전체를 싸잡아 질타하는 것을 과연 공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행태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학생인권이 얼마나 짓밟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꼭 폭력이 아니더라도, 요즘 애들 버릇없고 못되었지 않은가. 체벌이 있었을 때도 그런데, 체벌이 없어지면 그런 게 더 심해지지 않을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렇듯, 질문 또한 특정한 관점을 전제하며 일정한 틀 안에서 대답이 맴돌도록 제약한다. ‘체벌을 안 하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도 안하고 ‘싸가지’ 없게 굴 텐데 괜찮을까’, ‘체벌 대신 어떤 벌을 주면 학생들이 말을 잘 들을까’ 같은 이야기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잘못된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화장품을 ‘금지’하기보다 왜 몸에 안 좋은지 ‘설명’을 해준다면?

체벌은 학생들이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교사의 지도에 따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데서 시작된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사회화가 되고 성숙한 존재가 되려면 무엇이 나쁜 행동이고 좋은 행동인지 벌과 상을 주어서 학습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강력한 교권을 통해 학생들을 잘 따르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대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다. 많은 경우 체벌은 불필요하며 강압적인 방식의 규칙과 지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16일 열린 <학생인권조례의 시대, 교사가 말하다>에서 “교칙을 바꿔야 하는데 진한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강에도 안 좋은데 그렇다고 금지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라는 생활지도부장 교사의 물음에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이렇게 답했다. “초등학교에는 화장 관련 규정이 없지만, 화장품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설명해놓은 글을 붙여놓으니 학생 중 아무도 화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청소년인권활동가는 “천연화장품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일반화장품이 피부에 좋지 않다면 천연화장품을 쓰라고 권하면 되지 않을까? 설득하고 대화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풀어야 할 문제를 놓고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방식만 고민한다면, 규제에 반발하는 학생들은 ‘싸가지’ 없게 보일 수밖에 없고 체벌의 유혹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

2010년 수도권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참교육연구소가 한 설문조사에서 체벌의 주된 이유(복수응답)로 ‘과제나 수업태도’가 56.8%, ‘두발복장문제’가 41.0%, ‘지각/결석’이 33.2%가 나왔다는 것에서도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학생은 머리카락을 길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7~8월에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일어났다. 그 중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제일 첫 번째로 내건 요구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두발자유’였다. 1980년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회사 규정에 따라 스포츠머리를 해야만 했으며, 매일 아침 회사 정문에서 경비대원들이 ‘바리깡’을 들고 두발단속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노조위원장을 했던 이갑용 씨는 “그때 우리들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 그런 것들의 상징이었다.”라고 회상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그랬고, 지금 학생들에게 그렇듯, 머리카락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결정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이다.

지각문제는 등교시간을 학생들과 논의해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등교시간이 너무 이른 학교들이 많다), 그래도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면 왜 지각을 하는지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손쉽게 때려서 해결하려 하는 건 반교육적 처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다.

학생은 싫증이 나도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체벌의 이유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수업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떠들어서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는 경우 말이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사의 감독 아래 열심히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여러 대안이 보인다. 예컨대 핀란드에서는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하거나 물을 먹고 온다고 해도 수업에 방해를 주지 않는 한 교사가 야단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원할 때 수업을 듣지 않고 쉬거나 다른 대체프로그램을 택할 수 있는 시간을 일정부분 보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러면 학생들이 싫은 수업을 듣지 않으려고 매번 그 제도를 사용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싫은 수업에 억지로 앉혀놓는다고 해서 그 학생이 수업을 잘 듣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오히려 잠을 자거나 주변 친구와 떠들어서 ‘교사의 분노’를 불러오는 일만 많을 것이다. 학생이 특정 수업을 싫어한다면 억지로 앉혀놓기보다 왜 그런지 이유를 고민하는 게 보다 나은 교육을 만들 수 있다.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흥미를 잃은 학생에게는 보충학습을 제공하고, 교사의 수업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교사와 교실 수를 늘려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통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고, 다른 몇몇 국가의 학교들처럼 학생들에게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수업에 흥미를 잃고 잘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에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 이야기가 되고 있지만, 학교가 계급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해 학생들에게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할 때 학교붕괴는 시작된다. 태어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설사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더라도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의욕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인가

교사들이 나서서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에서는 불합리하며 반인권적인 교칙이 학생들을 억압하고,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듣기 싫은 수업을 억지로 참고 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걸 견뎌내도 졸업 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학생들이 왜 교사의 지도를 감내하고 있어야 할까?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체벌 대신 상벌점제를 도입하느니(옳지 못한 행동을 100번 해도 옳은 행동을 100번 하면 그것이 상쇄될 수 있다는 상벌점제는 반윤리적이기까지 하다), 정학과 퇴학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느니 이야기하는 것은 소외받는 학생들을 무참히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체벌금지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지 <청람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

우리, 진보교육감 홍위병 아닙니다

5일 아침 “동아일보 1면에 아수나로가 실렸더라”는 믿기지 않은 소식을 시작으로, 아수나로는 지금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됐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보수 언론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언론들이 소위 ‘홍위병’을 운운하며 연일 아수나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을 내보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들이 진보교육감과 교육의원들에게 선동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수나로가 진보교육감 당선 이전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꾸준히 활발하게 활동해온 단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 언론들의 논조에는 문제가 많다. 이들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미성숙하며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의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경쟁을 거부하며 학생 인권과는 관계없는 정치적 이슈에 뛰어들고 있다.”

7월 7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이성호씨의 칼럼(학생이 평가 싫어 거리로 나선다고?)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수나로의 주장이 옳다면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든 종류의 평가는 물론 사회적으로 경쟁을 유발하는 어떠한 체제나 제도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평가=경쟁=인권침해’라는 등식은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수나로는 그러한 등식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수나로는 경쟁이 교육의 목적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고사라는 평가제도로 인해 초등학교까지 야자를 하는 등 학생들은 강제야자와 보충수업을 해야 하며 “목숨걸고 공부”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 과연 “학생들의 학습을 동기화하고 교육의 과정 전체를 점검”하기 위한 평가인가?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현실이니 학생들의 학습이 시험에 ‘동기화’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이러한 현실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일제고사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라고 말하기 이전에, 경쟁적 교육체제가 아동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한국에 개선을 권고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문(CRC/C/15/Add.197 2003년 1월)이나 먼저 읽어보길 바란다.

교원평가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반에 20명 이상 보충수업에 참여하게 해라. 교원평가에 반영하겠다”고 말한 교장이 벌써부터 나오는 등 교원평가가 학생들을 위한 것,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교원평가는 교장이 교사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에서 말하는 ‘공교육의 질 제고’나 ‘더 좋은 교육’이라는 건 더 강화된 입시교육과 말 잘 듣는 교육을 의미하지,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나 인권교육, 인성교육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원평가가 강제보충수업 등을 늘리고 반 평균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체벌하는 등 교사의 반인권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지금의 학교 현실과 보고되는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동기를 부여하거나 참여를 보장한다고 할 때, 그것을 점수 매기고 줄세우는 ‘평가’, ‘경쟁’의 방식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다. 학생과 교사가 좀 더 평등한 권력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고 대화하는 민주적인 학교와 수업이 지금의 교육의 문제점을 고치기에는 훨씬 낫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교장 선출에도 학생회가 참여하며, 학교 규정은 물론 심지어는 흡연을 허용할지 말지 여부조차도 학생회가 회의로 결정하곤 한다. 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 또한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과 교육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학생들이 왜 교육정책에 왈가왈부하냐는 식의 말이야말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인권은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였다. 지배자들은 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우리를 ‘홍위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애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홍위병’이라는 그 무례한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교육생각>에 게재된 글입니다.

지방선거 단상

지방선거가 끝났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개표 방송을 보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았고, 하루 종일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1991년 5월에 태어나 만 19세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방선거날 아침 일찍 가야할 곳이 있어서,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을 때 투표를 하러 갔다. 노인들이 많았고, 나 빼고 가장 젊어보이는 사람이 40대 정도였다. 이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대개 누구에게 투표하러 왔는지 짐작이 갔기에, 나는 징글징글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 투표하느냐를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번 선거에서 서초구 주민으로서 투표했다. 기숙사로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인데, 순전히 ‘곽노현 교육감’과 ‘노회찬 시장’을 뽑기 위해서였다. 곽노현 씨가 진보교육감 후보로 단일화된 다음날 바로 전입신고를 했다. 경선에 나온 진보교육감 중 가장 인권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그로 단일화된 것은 나에게 꽤나 기쁜 일이었다.

전입신고할 때는 기쁜 마음이었지만, 막상 선거가 다가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투표용지 8장 중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이름답게 서초구에는 ‘진보’ 교육의원 후보가 나오지 않았고, 구청장과 시의원, 구의원, 기초비례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나오더라도 찍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 투표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무효표를 만들지는 않아도 되는데.

이번 선거에서 나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게 표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노회찬 후보가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아서 한명숙 후보가 졌다며 노회찬 후보에게 심한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라 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무효표가 유효한 정치적 의견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내가 했던 고민(그것이 유치한 것일지라도)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리려면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글로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선거 전 몇몇 사람들에게 내 결정을 이야기하며 약간은 섬뜩한 농담을 곁들이곤 했다. “만약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이긴 후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전부 숙청해버릴 거라면, 나는 무효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어.” 내가 보기에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보이는 행태는 이러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선거가 이번이 끝인양,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종신직이라도 보장받는양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무지한 탓인지, 나는 민주당과 국참당이 어떻게 지방정치를 바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공약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분명 약간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을 뽑으면 좀 더 살기 좋아지겠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없었다. <딴지일보>는 ‘서초민주당’을 무척이나 칭찬하던데, 나는 이들의 공약을 읽어봐도 딱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내가 서초구 주민이라기 보다는 서초구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떠날 외부인이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살던 고향에 나온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 ((그 후보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해운대에는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가 총 3명 나왔는데, 3명 모두 당선되었다.))의 공약과 이들의 공약을 비교하며 내가 서초구로 주소를 바꾼 것을 아쉬워했다.

하여튼, 나는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었고, 그 선택을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쩌면 한나라당이 당선되는데 보탬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서초구 구청장과 시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구의원만 민주당 후보 한 명이 당선되었다.)), 나는 이 선택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낫다고 판단했기에 이렇게 하였다.

좋게 생각해서 지방선거가 지방정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선거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012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이번처럼 민주당이 승리한다고 하자. 과연 그 승리가 천년만년 계속될까. 대안 없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심판을 위해’ 찍어달라고 해서 얻은 표는 쉽게 가버리기 마련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인 선거 때조차 ‘정권 심판’ 외에는 민주당을 왜 찍어야 하는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들이 또 다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빼앗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되면서 한국 정치는 점점 더 보수화될 것이고,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무효표를 만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쁜 것은, 곽노현 후보가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인천과 부산에서 진보교육감 후보가 2위로 떨어진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6명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다는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를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한편 든다. 내가 진보교육감 당선을 바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인데, 어쩌면 이들의 당선이 내 바람에 오히려 적(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이다.

학생들은 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학부모들은 학생인권조례에 딱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학부모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자신의 자녀가 자퇴하도록 허락해줬거나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이 말은, 교육감에게 학생인권조례가 후순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 세력은 별로 영향력이 없고, 반대하는 세력의 힘은 막강하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진보교육감’ 하나만 믿고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압박 없이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힘든데, 학생들은 “이젠 되겠지”라고 말하며 “언제 되나요?”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초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던 경기도에서 숱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가 있는데, 수원지부 게시판에는 매일같이 “학생인권조례가 언제 만들어지나요?” 따위의 글이 올라오는 실정이다.

학생들이 각 교육청에 그런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끼고 학생인권조례를 서둘러 추진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별로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진보교육감의 당선이 청소년들의 행동을 약화시키지는 결과만 낳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대다수 청소년들이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이 할 일이겠지만.)) 이게 노파심이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지방선거 후에 드는 잡생각이 많다….

두부 퍼포먼스, 규환지옥과 대규환지옥

두부를 먹고 있는 난다 활동가. 뒤로는 피켓이 보인다.

“졸업은 석방…출소 기념해 두부 먹어요”

예상했던대로 많은 악플. 이 퍼포먼스를 기획(?)한 사람으로서 오늘 수원에서 퍼포먼스를 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낀다. 곧 있을 서울 퍼포먼스도 기사화 되면 얼마나 욕을 먹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부산은 다음 주나 되어야 퍼포먼스를 해서 욕을 먹긴 커녕 기사화도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사회에 나와보면 학교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 거다”라는 덧글이 참 많은데, 맞는 말이다. 아수나로 전국총회에서 두부 퍼포먼스 논의를 할 때도 “두부를 먹고 나서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히는 식으로 퍼포먼스 해보는 거야”라고 누군가 의견을 냈었다. 의미 전달이 불명확해질까봐 뺐지만.

왜 힘든 사람끼리 누가 더 힘든가를 경쟁해야 하는가? 왜 힘든 사람끼리 서로 헐뜯고 싸워야 하는가? 규환지옥 ((불교의 팔열지옥 중 하나로, ‘고통을 못 견디어 원망과 슬픈 고함이 절로 나오는 지옥’이라고 한다.))이나 대규환지옥 ((불교의 팔열지옥 중 하나로, ‘지독한 고통에 못견디어 절규하며 통곡을 터뜨리게 되는 지옥’이라고 한다.))이나 지옥은 지옥이다. 규환지옥보다 대규환지옥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해보아야 무슨 소용일지. 그러한 태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을 영속시킬 뿐이다.

두부 퍼포먼스가 좀 도발적이라서 이런 욕을 먹는다고 보기는 뭣한게, 아수나로가 한 대외활동에서 욕을 안 먹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소녀시대의 서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학교 가는게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라면 욕을 안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수나로는 그런 청소년을 원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 읽어보고자 하는 분은 촛불소녀, ‘도전’과 ‘희석’의 줄다리기를 참고하시길.)) 아수나로가 욕을 먹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두부 퍼포먼스 자체가 어떠했느냐와는 관계 없이.

하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규환지옥보다 대규환지옥이 더 고통스럽다고 해서, 규환지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꼭 그렇게 헐뜯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해도 괜찮다면, (규환지옥은 아니더라도) 대규환지옥을 없애기 위해 함께 노력해주셨으면 좋겠다. 평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한 정당, 시민·사회단체가 있다면, 그 곳에 월 5,000원 정도 기부하는 정도라도. 그런 단체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옥을 벗어날 궁리를 하긴 커녕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를 경쟁해야 하는 현실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