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 등록금은 정당하다

<서울교대학보>(이하 학보)는 제432호 사설에서 ‘반값 등록금’에 대해 “또 하나의 포퓰리즘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 없이 공약을 남발하는 무책임한 정치가를] 가려낼 혜안이 없는 국민들이라면 무상, 복지라는 미망에서 벗어날 자격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고민이 없는 것은 학보가 아닌지 의문스럽다. 2010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2007년 기준 한국의 대학 교육에 대한 정부 재정부담율은 20.7%밖에 안 된다. OECD 평균인 69.1%, EU 19개국 평균인 79.4%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치이다. 정부의 재정부담율을 OECD 평균 수준까지 올리면 등록금을 반값 이하로 내릴 수 있다. ((우석균, “‘반값 등록금’ 촛불이 이기려면”, 레프트21 59호 2011-06-18))

학보는 “등록금을 반값으로 하면 (…) 국민의 세부담을 가중” 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세금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부자 감세로 없어진 돈의 4분의 1만 있으면 반값 등록금이 가능하다. 자본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 것을 두고 “국민의 세부담”까지 운운할 이유는 없다. 등록금을 낮추고 정부가 충당하는 비율을 늘리는 것이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부담을 훨씬 더는 길이다. 게다가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은 “부동산 등 자산경제에 제대로 세금을 부과하고 탈루소득을 잡아내면 (…) 50조 원의 세수는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법인세 감면 등 부자 감세를 해야 투자가 늘고 경제가 살아나 반값 등록금 같은 ‘복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법인세 감면의 효과가 미미하다고 반박한다. “기업소득이 1만 원 늘어날 때 설비투자는 고작 1천80원 늘어났다.”라고 한다. 나머지 9천 원은 기업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을 뿐이다. ((장호종, “부자 감세, 4대강 삽질할 돈으로 복지를 늘려라”, 레프트21 50호 2011-02-05))

물론 한국은 대학 진학률이 높고 부실한 사립대가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나쁜 일인가? 고등교육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하며,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공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충당하는 비율을 OECD 평균까지만 올려도 반값 등록금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앞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부실한 사립대의 질을 높이려면 이 대학들을 국·공립화하든지 국·공립 대학을 늘려 이들 대학의 교수와 학생을 흡수하면 된다. 한국의 등록금 부담이 높은 데에는 사립대 비중이 78%나 되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도 한몫한다. (물론 국·공립 대학의 등록금도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절대로 싸지 않다. 실질구매력지수(PPP) 기준 2007~2008년 한국의 국공립대의 평균 등록금은 4천717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이다.) 부실한 사립대를 걱정하기 이전에 이러한 해법은 고민해보았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등록금이 가장 높은 대학들은 대부분 부실 사립대가 아니라 소위 ‘명문’ 사립 대학들이다. 이들 대학은 예산을 뻥튀기해 등록금을 올려 받고 이를 남겨서 막대한 적립금을 쌓아왔다. 현재 전국 사립대의 누적 적립금은 9조 2천억 원에 달한다. 적립금 1위인 이화여대는 1년 적립금 8백38억 원을 장학금으로 주면 60.4%의 학생들이, 2위인 연세대는 43.7%의 학생들이 ‘공짜로’ 대학에 다닐 수 있다.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은 삶의 기회를 넓히고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이기도 하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책에서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다. 역사를 볼 때,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들은 사람들의 행동이 없었다면 쟁취 될 수 없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한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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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금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

서울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이후, 여러 언론들이 연일 ‘추락하는 교권’, ‘무너지는 학교’를 말하며 학생의 교사에 대한 폭언·폭행 사건을 쏟아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체벌이 없으면 교권이 무너지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먼저 한 가지 사실관계부터 지적해보자. 조금만 유심히 이 기사들을 읽어본다면, 정작 이 사건들은 체벌이 금지된 서울·경기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언론들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체벌이 금지되지 않았던 2006년에 제작된 동영상까지 뒤져가며 열을 올렸다.

만약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언론들은 손쉽게 서울․경기에서 일어난 ‘교권침해’ 사건들을 무더기로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70% 정도의 교사가 체벌을 하고 있으며 20% 정도는 체벌을 ‘자주’ 하는(참교육연구소, 2010) 한국 현실에서, 0.1%나 될지 의문인 극소수 학생들이 교사에게 저지르는 폭력만을 부각시키며 학생 집단 전체를 싸잡아 질타하는 것을 과연 공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행태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학생인권이 얼마나 짓밟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꼭 폭력이 아니더라도, 요즘 애들 버릇없고 못되었지 않은가. 체벌이 있었을 때도 그런데, 체벌이 없어지면 그런 게 더 심해지지 않을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렇듯, 질문 또한 특정한 관점을 전제하며 일정한 틀 안에서 대답이 맴돌도록 제약한다. ‘체벌을 안 하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도 안하고 ‘싸가지’ 없게 굴 텐데 괜찮을까’, ‘체벌 대신 어떤 벌을 주면 학생들이 말을 잘 들을까’ 같은 이야기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잘못된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화장품을 ‘금지’하기보다 왜 몸에 안 좋은지 ‘설명’을 해준다면?

체벌은 학생들이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교사의 지도에 따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데서 시작된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사회화가 되고 성숙한 존재가 되려면 무엇이 나쁜 행동이고 좋은 행동인지 벌과 상을 주어서 학습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강력한 교권을 통해 학생들을 잘 따르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대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다. 많은 경우 체벌은 불필요하며 강압적인 방식의 규칙과 지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16일 열린 <학생인권조례의 시대, 교사가 말하다>에서 “교칙을 바꿔야 하는데 진한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강에도 안 좋은데 그렇다고 금지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라는 생활지도부장 교사의 물음에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이렇게 답했다. “초등학교에는 화장 관련 규정이 없지만, 화장품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설명해놓은 글을 붙여놓으니 학생 중 아무도 화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청소년인권활동가는 “천연화장품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일반화장품이 피부에 좋지 않다면 천연화장품을 쓰라고 권하면 되지 않을까? 설득하고 대화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풀어야 할 문제를 놓고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방식만 고민한다면, 규제에 반발하는 학생들은 ‘싸가지’ 없게 보일 수밖에 없고 체벌의 유혹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

2010년 수도권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참교육연구소가 한 설문조사에서 체벌의 주된 이유(복수응답)로 ‘과제나 수업태도’가 56.8%, ‘두발복장문제’가 41.0%, ‘지각/결석’이 33.2%가 나왔다는 것에서도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학생은 머리카락을 길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7~8월에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일어났다. 그 중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제일 첫 번째로 내건 요구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두발자유’였다. 1980년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회사 규정에 따라 스포츠머리를 해야만 했으며, 매일 아침 회사 정문에서 경비대원들이 ‘바리깡’을 들고 두발단속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노조위원장을 했던 이갑용 씨는 “그때 우리들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 그런 것들의 상징이었다.”라고 회상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그랬고, 지금 학생들에게 그렇듯, 머리카락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결정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이다.

지각문제는 등교시간을 학생들과 논의해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등교시간이 너무 이른 학교들이 많다), 그래도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면 왜 지각을 하는지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손쉽게 때려서 해결하려 하는 건 반교육적 처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다.

학생은 싫증이 나도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체벌의 이유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수업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떠들어서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는 경우 말이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사의 감독 아래 열심히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여러 대안이 보인다. 예컨대 핀란드에서는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하거나 물을 먹고 온다고 해도 수업에 방해를 주지 않는 한 교사가 야단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원할 때 수업을 듣지 않고 쉬거나 다른 대체프로그램을 택할 수 있는 시간을 일정부분 보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러면 학생들이 싫은 수업을 듣지 않으려고 매번 그 제도를 사용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싫은 수업에 억지로 앉혀놓는다고 해서 그 학생이 수업을 잘 듣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오히려 잠을 자거나 주변 친구와 떠들어서 ‘교사의 분노’를 불러오는 일만 많을 것이다. 학생이 특정 수업을 싫어한다면 억지로 앉혀놓기보다 왜 그런지 이유를 고민하는 게 보다 나은 교육을 만들 수 있다.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흥미를 잃은 학생에게는 보충학습을 제공하고, 교사의 수업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교사와 교실 수를 늘려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통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고, 다른 몇몇 국가의 학교들처럼 학생들에게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수업에 흥미를 잃고 잘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에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 이야기가 되고 있지만, 학교가 계급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해 학생들에게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할 때 학교붕괴는 시작된다. 태어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설사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더라도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의욕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인가

교사들이 나서서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에서는 불합리하며 반인권적인 교칙이 학생들을 억압하고,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듣기 싫은 수업을 억지로 참고 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걸 견뎌내도 졸업 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학생들이 왜 교사의 지도를 감내하고 있어야 할까?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체벌 대신 상벌점제를 도입하느니(옳지 못한 행동을 100번 해도 옳은 행동을 100번 하면 그것이 상쇄될 수 있다는 상벌점제는 반윤리적이기까지 하다), 정학과 퇴학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느니 이야기하는 것은 소외받는 학생들을 무참히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체벌금지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지 <청람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

우리, 진보교육감 홍위병 아닙니다

5일 아침 “동아일보 1면에 아수나로가 실렸더라”는 믿기지 않은 소식을 시작으로, 아수나로는 지금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됐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보수 언론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언론들이 소위 ‘홍위병’을 운운하며 연일 아수나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을 내보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들이 진보교육감과 교육의원들에게 선동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수나로가 진보교육감 당선 이전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꾸준히 활발하게 활동해온 단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 언론들의 논조에는 문제가 많다. 이들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미성숙하며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의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경쟁을 거부하며 학생 인권과는 관계없는 정치적 이슈에 뛰어들고 있다.”

7월 7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이성호씨의 칼럼(학생이 평가 싫어 거리로 나선다고?)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수나로의 주장이 옳다면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든 종류의 평가는 물론 사회적으로 경쟁을 유발하는 어떠한 체제나 제도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평가=경쟁=인권침해’라는 등식은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수나로는 그러한 등식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수나로는 경쟁이 교육의 목적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고사라는 평가제도로 인해 초등학교까지 야자를 하는 등 학생들은 강제야자와 보충수업을 해야 하며 “목숨걸고 공부”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 과연 “학생들의 학습을 동기화하고 교육의 과정 전체를 점검”하기 위한 평가인가?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현실이니 학생들의 학습이 시험에 ‘동기화’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이러한 현실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일제고사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라고 말하기 이전에, 경쟁적 교육체제가 아동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한국에 개선을 권고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문(CRC/C/15/Add.197 2003년 1월)이나 먼저 읽어보길 바란다.

교원평가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반에 20명 이상 보충수업에 참여하게 해라. 교원평가에 반영하겠다”고 말한 교장이 벌써부터 나오는 등 교원평가가 학생들을 위한 것,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교원평가는 교장이 교사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에서 말하는 ‘공교육의 질 제고’나 ‘더 좋은 교육’이라는 건 더 강화된 입시교육과 말 잘 듣는 교육을 의미하지,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나 인권교육, 인성교육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원평가가 강제보충수업 등을 늘리고 반 평균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체벌하는 등 교사의 반인권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지금의 학교 현실과 보고되는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동기를 부여하거나 참여를 보장한다고 할 때, 그것을 점수 매기고 줄세우는 ‘평가’, ‘경쟁’의 방식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다. 학생과 교사가 좀 더 평등한 권력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고 대화하는 민주적인 학교와 수업이 지금의 교육의 문제점을 고치기에는 훨씬 낫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교장 선출에도 학생회가 참여하며, 학교 규정은 물론 심지어는 흡연을 허용할지 말지 여부조차도 학생회가 회의로 결정하곤 한다. 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 또한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과 교육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학생들이 왜 교육정책에 왈가왈부하냐는 식의 말이야말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인권은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였다. 지배자들은 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우리를 ‘홍위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애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홍위병’이라는 그 무례한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교육생각>에 게재된 글입니다.

릴레이 지정문답, 교육

Skyjet님이 보낸 릴레이 지정문답. 주제가 ‘교육’이라니,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일단 답을 써본다.

1. 최근 생각하는 ‘교육’

한자 敎育이나, 영어 education의 어원인 라틴어 educatio 둘 다 미숙한 상태를 성숙하게 ‘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교육의 이러한 의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교육을 받는 사람이, 교육을 하는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교육일까?
나는 서로를 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구분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셰르파와 등산가의 관계에 비유하고 싶다. 셰르파는 산에 오른 경험이 등산가보다 더 많지만, 그렇다 해서 등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산에 오를 때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올라가는 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셰르파들이 받는 처우를 생각해볼 때, 이 비유는 적절치 않은지도 모르겠다. 셰르파의 지위는 지금보다 높아져야 하고, 교사의 지위는 지금보다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이런 ‘교육’ 감동!

이계삼 선생님이 쓴 칼럼을 읽고 감동을 한 적이 있다. 일본 드라마 <양키-모교로 돌아오다> (ヤンキ-母校に帰る)를 보면서도 감동을 했었고. (물론 100%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지만.)

3. 직감적으로 ‘교육’

dialogue.

4. 좋아하는 ‘교육’

세상을 보는 눈을 변화시키는 교육.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교육.

5. 이런 ‘교육’ 싫어

이런 건 교육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입시’ 교육. 국가경쟁력 따위를 들먹이며 ‘인간’을 보지 않고 ‘국가’를 보는 교육.

6. 다음에 넘겨줄 7명

  • 공현 – ‘욕망’
  • 릴로 – ‘책’
  • 아크몬드 – ‘윈도우즈’
  • 정현 – ‘디자인’
  • 쩡열 – ‘음악’
  • 플라스틱 – ‘영화’
  • 해밀 – ‘철학자’

가치중립적인 교육?

공현의 글에 달린 덧글들을 보고 쓰는 글. 두서없이 적었다.

간단히 말해서, 교육에서 ‘가치중립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좋든 싫든 가치판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몇십 년간 지구의 평균온도가 오르고 있다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도 가치판단이 이루어진다. 혹자는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화석 연료를 과도하게 사용해서 발생한 것이고, ‘많은 문제를 불러올 것이므로 좋지 않다’고 판단을 내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이 지구온난화를 일으킨 것은 맞지만, ‘북극 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좋다’고 판단을 내릴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가치판단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는 말 속에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지구온난화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아무 말도 않는 것 또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결국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옳다’는 판단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단순한 자연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수많은 정보 중에, 어떤 정보를 선별하여 어떤 시기에 얼마나 제공하여야 하는가? 자연과학적 정보 제공 또한 중립적일 수는 없을진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적인 정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교육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그러나 교육이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 어떠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발언이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곡’과 ‘불관용’을 일삼는 교육은 ‘불관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현의 글에 나오는 교사가 잘못된 이유는, 학생의 정당한 서명 참여를 관용하지 않고 체벌이라는 폭력으로 대응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일제고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 학생이 참여한 서명이 ‘일제고사 반대’가 아니라 ‘일제고사 찬성’ 서명운동이라도 마찬가지이고, “보수 노인들”의 “빨갱이 때려잡자”(gg님의 덧글)는 서명운동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빨갱이 때려잡자”는 “보수 노인들”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고 해서 학생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그 교사와 “보수 노인들”이 무엇이 다른가?

‘왜곡’과 ‘불관용’을 일삼는 교육은 ‘불관용’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왜곡’과 ‘불관용’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교육이던 ‘관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일제고사에 관해 자신이 취하는 관점을 수업시간에 말하는 것 따위 또한 말이다. 앞서 말했듯, 일제고사에 관해 ‘가치중립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무 말 않는 것 또한 바람직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강요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여태껏 그런 교사는 없었지만) 만약 어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무조건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태껏 이런 교사는 많았지만) 만약 어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무조건 봐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학생들은 ‘미성숙’하므로 교사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과연 학생들이 ‘미성숙’한가,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판단을 하는 능력이 떨어지는가의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바로 그래서 어떠한 교육이던 허용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다양한 가치판단을 접하고, 자신의 가치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 만약 그런 판단을 내릴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가치판단을 접해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사회의 지배층에게 유리한 가치판단만을 학교에서 접하고 있지 않은가?

요약해보자. ‘가치중립적’인 교육이란 불가능하며 ‘왜곡’과 ‘불관용’, 그리고 ‘강요’ 따위를 일삼지 않는 교육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교사는 그런 교육이 아닌 한 어떠한 교육이던 할 수 있다. (현행법상에서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그럴진대, 인권운동가는 왜 안 되는가? 게다가 공현이 한 것은 교육도 아니고, 단지 서명을 받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학생들에게 설득시키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벌이라는 폭력으로 막으려 한 교사는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며, 그 교사가 그렇게 행동한 근거인 ‘학생들은 미성숙하고 가치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보호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상 ‘학생들은 (학교의 방침에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는) 특정한 가치관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나쁜 아이

2006년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새로운 교감이 부임해왔고, 그는 학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 반에는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나쁜 친구가 아니었다. 단지 술과 담배 그리고 오토바이를 좋아하고,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그런 친구일 뿐이었다. ‘어른들’에게는, ‘나쁜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겠지만.

그런데, 그 새로 온 교감은 나를 그 친구로 착각한 듯 했다. 그 친구와 내가 함께 있을 때, 한 선생이 그를 가리키며 교감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한 이후로, 교감이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너, 무슨 애로사항 있니? 괜찮아, 다 이야기해 봐.”

나는 그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선생님이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친구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그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착각을 바로잡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쁜 아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누군가를 해코지한다는 말을, 나는 전혀 들은 적이 없다. ‘어른들’은 그가 술과 담배 그리고 오토바이를 좋아하고,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나쁜 아이’로 취급했다.

그리고 그 교감은 그 ‘나쁜 아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다만, 그 친구가 아니라 나에게 ‘다가왔’지만.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한 달이었다. ‘나쁜 아이’로 낙인찍힌 그 친구가 여태껏 느껴왔을 기분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여태껏 늘 ‘착한 아이’로 살아왔던 나는, 분명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이 제 딴에는 매우 ‘친절한’ 것이었겠지만, 그 시선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칼날을 목에 들이대는 느낌’이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점점 지날 수록, 그의 시선에서 뭔가 의아하다는 생각이 느껴졌고, 결국 한 달 뒤에는 사실(?)을 알게 된 듯 했다. 그 친구에게, 나에게 주던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던지며 ‘애로사항 없냐고’ 묻기 시작했으니까. 그 친구는 교감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그를 피하곤 했다.

만약 내가 교사가 된다면, 과연 나는 그 교감처럼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관심이랍시고, 또다른 칼날을 들이대는. 자신이 없다.
왠지 그 친구가 만나고 싶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