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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엡도 살해 사건: 표현의 자유? 이슬람 혐오증!

2015년 1월 7일 파리, <샤를리 엡도>라는 잡지 편집부 사무실에서 끔찍한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공격은 잘못된 것이고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우려스러운 상황이 뒤따르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우익들은 1월 7일 파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해 사건을 이용해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고, 제국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하고, 무슬림 혐오를 부추기려 한다.

이번 공격이 잘못된 것이고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인종차별을 조장하거나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극우에게 유리하게 이용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1월 8일자 성명.

아마도 추측건대 한국 뉴스에서도 많이 다뤄진 사건이고, 프랑스에 살고 있거나 살다 온 경험이 많이들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중·고등학교 때 동기들이 다른 이슈에 비해 관심을 여럿 보인다. 내 주변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프랑스 좌파들이 대개 이슬람주의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점 때문에 이슬람 혐오증에 제대로 대처해오지 못했듯 한국의 몇몇 좌파들도 지금 혼란스러운 것 같은데, 그런 좌파들의 글도 대개 많이 인용된다. 1 대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고, 제국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하고, 무슬림 혐오를 부추기려” 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우익들의 시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이런저런 글과 링크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블로그에 편집해 모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에 계속 업데이트할 계획이다.


프랑스에 사는 지인이 많아서 그런지, <샤를리 엡도> 편집부 살해 사건을 두고 생각보다 뉴스피드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살해 사건은 분명 끔찍한 범죄행위이지만, 이것이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건이라는 식의 반응에는 문제의식을 느낀다.

프랑스에서 ‘표현의 자유’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자들은 국민전선(Front National) 같은 파시스트지, 이번 살해 사건을 주도한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프랑스 좌파들의 혼란스러운 태도가 국민전선 등이 성장하는 현 상황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김문성 씨의 논평을 아래에 인용한다.

고향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에게 후원받는 독재자들에게 유린되고, 이민 온 유럽에서는 2등 시민, 3등 시민으로 천대 받는 사람들의 종교를 비꼬고 모욕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로 옹호 받을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를 함께 비웃었다고 해도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어디에도 기독교 신도라고 천대 받고 린치 당하며 열등인 취급 받는 나라는 없다. 히잡 금지는 있어도 십자가 금지는 없다.

유럽에서 무슬림 망신주기는 소신 있는 풍자가 아니라 체제의 인종차별과 편견에 편승하는 것일 뿐이다. 우익적 광기에 눈 감는 일이다. 약자를 비꼬는 건 풍자도 아니다. 일베의 ‘홍어 택배’ 운운이나 구제불능의 여성 비하가 단지 유해한 공해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피지배 민중에게 필요한 것이지, 국가가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인종차별에 편승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위한 것을 포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이 독재의 문명인가? 이슬람 파시즘? 무슬림 독재자와 무슬림 민중이 있는 사회의 민주주의 문제에서 종교가 분단선인가? 계급이 분단선인가?

예를 들어, 막간의 혁명을 사이에 두고 서구화 추구 독재와 이슬람신정주의 추구 독재가 이어진 이란에서 종교가 독재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정권은 히잡을 강제로 벗게 했고, 한 정권은 강제로 쓰게 했다.

테러는 잘못이고 비극적 사건이지만, 언론의 자유 문제로 몰고가는 건 그 자체로 틀린 얘기다. 그런 오도는 무슬림 전체를 자유의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극우와 파시스트들을 고무할 뿐이다.

진정한 배경은, 제국주의의 중동 억압과 독재자 후원이고, 침략과 폭격과 고문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고,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서구에서 벌이는 이주자 인종차별과 무슬림혐오증(편견)이다.

강자들에 의해 ‘표현되고 실천되는 편견들’의 제물이 돼 왔던 그들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위협자란 말인가?

— 2015년 1월 9일.


손이상 씨가 “샤를리는 단지 선지자 마호메트를 ‘그림으로 그렸을 뿐’”이라며 샤를리 엡도의 만화 <무함마드의 생애>를 예로 들며 “선지자를 조롱하거나 이슬람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시는 걸 뉴스피드에서 우연히 봤다.

황당한 소리다. 그래서,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교와 무함마드를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왔는지 소개하고 싶다.

나는 여기서 유럽 내 소수자인 무슬림에 대한 괴롭힘에 편승하는 비열함밖에 안 보인다. 당연히 이번 살해 사건은 정말이지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이지만, 이것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몰고가는건 이들이 여태까지 저질러온 비열함에 면죄부를 주는 것밖에 안 된다.

이 와중에 국민전선 파시스트 마린 르 펜이 신이 나서 “생명과 자유는 가장 소중한 가치(Life and liberty are among the most precious values)”라며 자신이 마치 자유의 수호자인양 포장하는 꼴을 봤다. 입맛이 쓰다.

— 2015년 1월 11일.


60여 명의 해외 정상들이 행진에 참가했고, “하루 파리 시내 전 지하철이 무료”였고, “4시간 동안 걷는 내내 마주친 거리의 광고 포스터판은 모조리 <나는 샤를리다> 로 변해 있었”던 것(정말이지 “저 비용은 어디서 나온” 걸까?)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2, 목수정 씨 같은 혼란스러운 좌파들이 프랑스 우익들의 반무슬림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보장해주고 있다.

샤를리 엡도 살해사건 이후 벌어진 프랑스 내 반무슬림 공격 사건을 표시한 지도를 다룬 <복스> 기사를 공유한다. 오직 우익들만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사회로 프랑스가 변해가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우려스러운데, 목수정 씨는 “자유에의 구체적 열망이 폭발적으로 치솟는 기분” 운운하고 있다.

— 2015년 1월 12일.


샤를리 엡도 살해사건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샤를리의 만평이 ‘이슬람 혐오증’이었다는 주장에 반박하시는 걸 들어보면, “샤를리는 ‘모두 까기’ 했거든?” 말고는 내용이 없어 보인다.

아니, 누가 모르나? ‘교황이 콘돔 들고 있는’ 유의 만평을 누구는 못 본 줄 아나…. 프랑스 사정을 자기들만 알고 있다는 양 말하는 것에 좀 짜증이 난다.

김문성 씨의 글 인용으로 ‘모두 까기’ 주장에 대한 반박을 대신하고자 한다.

기독교를 함께 비웃었다고 해도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어디에도 기독교 신도라고 천대 받고 린치 당하며 열등인 취급 받는 나라는 없다. 히잡 금지는 있어도 십자가 금지는 없다.

유럽에서 무슬림 망신주기는 소신 있는 풍자가 아니라 체제의 인종차별과 편견에 편승하는 것일 뿐이다. 우익적 광기에 눈 감는 일이다. 약자를 비꼬는 건 풍자도 아니다. 일베의 ‘홍어 택배’ 운운이나 구제불능의 여성 비하가 단지 유해한 공해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피지배 민중에게 필요한 것이지, 국가가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인종차별에 편승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위한 것을 포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 2015년 1월 13일.


영국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Coalition)의 트윗(@STWuk).

Grotesque that at head of today’s ‪#‎ParisMarch‬ was Netanyahu whose war on Gaza last August killed 17 journalists http://t.co/RtChArVcUE

오늘 ‪#‎파리행진‬의 선두에, 지난 8월 가자 지구에서 17명의 언론인을 죽였던 전쟁을 일으킨 네타냐후가 있었다는 기괴함.

— 2015년 1월 13일.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샤를리 엡도에서 일했던, 올리비에 시랑(Olivier Cyran)의 글 ‘샤를리 엡도: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 글은 살해사건 이전인 2013년 12월에 쓴 것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샤를리의 만평이 매우 불쾌한데, 보시는 분들께 양해를 바란다.

내가 웬만해서는 그냥 공유하겠는데, 이렇게 샤를리의 만평이 첨부된 글은, 내 무슬림 친구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하고 공유할 수밖에 없겠다. 아무리 샤를리의 만평이 인종차별주의적이라 비판하는 글이라지만,

무함마드의 추문을 담은 영화를 찍는 중: “정말로 무함마드가 돼지 머리와 섹스를 했다고 생각해?”(돼지 머리를 들고 무함마드로 분장한 배우) “인마, 난 9살짜리 창녀를 지불할 돈이 없어!”(촬영감독)

이따위 그림을 만평이랍시고 보면, 도대체 누가 화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언론은 이번에 공격받은 <샤를리 엡도>를 평범한 “풍자 잡지”로 그린다. 그러나 그 잡지는 한때는 그랬었지만, 그동안 이슬람을 상대로 한 선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전문으로 해 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사건의 근본적 배경이다.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1월 8일자 성명.

올리비에 시랑의 글을 읽어보면 국제사회주의경향 성명의 저 문단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수정 씨가 “한때” 시절 얘기를 들고 와서, 이 잡지가 2001년 이후 보여온 “이슬람을 상대로 한 선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공격”이 평범한 ‘풍자’였던양 물타기 하는 게 몹시 거슬린다.

— 2015년 1월 14일.


Is freedom of expression an absolute value in France? Not for sociologist Said Bouamama and rapper Saidou. They are set to stand trial in France next week over a book and song they produced in 2010 called “Fuck France: the duty to be insolent”. Said told Socialist Worker why they needed to speak out.

프랑스에서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 가치인가? 사회학자 사이드 부아마마와 랩퍼 사이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2010년에 “우라질 프랑스: 무례해질 의무”라는 제목의 책과 곡을 만든 혐의로 다음주부터 프랑스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사이드는 왜 그들이 공개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는지를 <소셜리스트 워커>에서 밝힌다.

— 2015년 1월 14일.


지난주부터 내내 샤를리 엡도 살해 사건과 그 전후의 ‘이슬람 혐오증’ 등등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게 중요한 문제이긴 하니 어쩔 수는 없을 것인데, 여하간 며칠간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로하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오늘 아침에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다른 주제의 글을 읽으려고 했다가, 또 폭발하고 말았다.

장-루이 가세(Jean-Louis Gassée)‘8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이폰’이라는 제목의 칼럼(원문보기) 서두에서 샤를리 엡도 살해 사건을 언급했다.

파리에서의 사건을 적으면서 시작을 여러 번 고친 끝에,필자는 필자가 너무나 많은 상대에 대해 분노했다는 결론을 내렸다.억압자들을 적대화 한다는 사실의 두려움이 되려 그들의 힘을 키운다는 사실, 어떠한 좋은 문화도 나쁜 취향이라는 해독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절대로 모욕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가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 하는 언론의 특정한 겁쟁이들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파리 교구장인 앙드레 뱅-트루아 추기경은 “제아무리 나쁜 취향인 캐리커처와 극도로 불공정한 비판도 살인과 같은 수준에 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After several false starts writing about the events in Paris, I’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m too angry at too many targets, starting with certain cowards in the media who don’t understand that the fear of antagonizing oppressors perpetuates their power, that no good culture can exist without a dose of bad taste, that the demand to never be offended is inhumane. As Cardinal André Vingt-Trois, archbishop of Paris puts it: ‘A caricature, even in bad taste, criticism, even extremely unfair, cannot be put on the same plane as murder.’

당연히 “제아무리 나쁜 취향인 캐리커처와 극도로 불공정한 비판도 살인과 같은 수준에 둘 수는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좀 더 많은 ‘살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몇 일전 “언론의 자유를 위한 행진”이라며 지배자들 주도로 시위를 벌인 장소는 1961년 프랑스 내 알제리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행진을 벌이다 경찰에게 6백 명(!)가량 살해당한 곳이기도 했다.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인디펜던트> 칼럼에 대한 김종환요약 중.

무슬림 절대 다수는 이런 미친 테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굳이 상관이 있다면 테러의 희생자가 대부분 무슬림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지난 수요일에 일어난 가장 치명적인 테러는 <샤를리 엡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예멘에선 경찰학교 밖에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차량 폭발이 일어나 최소한 37명이 사망했습니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뉴욕타임스> 칼럼(뉴스페퍼민트 번역).

— 2015년 1월 15일.


[영국 반전 국회의원] 조지 갤러웨이에게 약점이 있을지라도, 그가 2005년 7월 런던 버스 테러 직후 하원에서 바로 토니 블레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한 것이 그 비극을 낳았다고 따져 물은 것은 영원히 칭찬받을 일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프랑스에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

벤사이드는 이런 태도가 “2개의 도전이 짐짓 대등한 것처럼 잘못 보이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프랑스 국가와 미국ㆍ영국 같은 그 동맹은 이슬람주의자들보다 비할 데 없이 더 파괴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 비록 이슬람주의자들이 고약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서방 지배자들의 폭력이 그 폭력을 모방한 역습과 보복을 직간접으로 유발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의 칼럼 ‘파리 공격은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파리 공격이 제국주의의 유산임을 지적하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프랑스에 없다는 건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프랑스 국가도 이슬람주의자들도 둘 다 틀렸다는” 식의 양비론적 태도가 왜 문제인지에 대한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의 지적도 새겨들을만하다.

— 2015년 1월 16일.


파리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의 1월 21일자 성명.

테러리스트들이 비난받는 것은 옳지만 제국주의 전쟁과 국내적 억압이라는 맥락을 봐야 한다는 점, ‘테러와의 전쟁’이 유럽에서 경제적 주변부이자 소수자였던 무슬림을 더욱 고립시키고 낙인찍어왔다는 점 등을 봐야 한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인종주의에 맞서 대중운동을 건설해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지금 여러 쟁점들이 섞여 있는데, 명확하게 사안별로 잘 정리한 성명.

— 2015년 1월 23일.


<딴지일보>의 기사 누가 쿠아시를 <샤를리 엡도>테러범으로 만들었나.

글쓴이의 말마따나,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쿠아시 형제를 비롯한 많은 이민자 2, 3세들을 아웃사이더로 만든 프랑스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덧붙이기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물론 이번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벌인 이들 쿠아시 형제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2세 남학생의 중퇴율은 40%, 여학생은 32%에 이른다. 그 중에서 알제리 출신 이주민(15세 이상)의 70.8%는 어떠한 학위도 없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3.1%만이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가 있다. 참고로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프랑스 인구 전체에서 어떤 학위도 없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들은 24.3% 정도이고, 고등학교 졸업 이상은 전체의 48.5%에 해당한다. 현재 대학을 마치고 직업전선에 있는 25세에서 49세 사이의 프랑스인 중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58.4%다.

— 2015년 1월 23일.


<허핑턴포스트>의 칼럼 난 무슬림으로서 ‘표현의 자유 근본주의자’들의 위선이 진절머리 난다. 속 시원하게 잘 썼다. 그나저나 <율란츠 포스텐>을 “네덜란드 신문”이라고 써놨길래 원문을 확인해보니, “the Danish newspaper”라고 맞게 적혀있다.

‘진보 인사’들에게.

당신들도 또 나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 9/11이 일어나자 “우리 편이 아니면 테러범 편이다”라고 하던 그의 유치한 발언을 기억하나? 그런데 최근 일어난 끔찍한 테러에 대한 당신들의 반응은 그의 구호를 업데이트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지 않으면 표현의 자유를 반대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이다. 샤를리 엡도 아니면 자유를 증오하는 광신주의자, 둘 중에 하나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매우 간단한 부탁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제발 그만하기 바란다. 이런 행동이 테러범에게 맞서는 방법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분열을 조장하고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피 묻은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된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계몽된 서양과 대비되는 야만적인 무슬림이 있다고 하는 셈이다. 당신들은 1월 7일 파리 총격이 표현의 자유를 겨냥한 것이라고 계속 외치고 있다. 보수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도 당신들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는 이번 사건을 “인류를 향한 전쟁 선포”라고 했다. 진보 진영의 대표인사인 존 스노우(Jon Snow)도 “문명의 충돌”을 거론하며 “유럽은 언론의 자유를 지향한다”는 식의 둔감한 얘기를 트위터에 했다.

— 2015년 1월 23일.


어제 소개한 국제사회주의경향의 성명 한국어판이 나왔다.

파리 살인극과 뒤이은 사태 전개는 급진좌파와 혁명적 좌파에게 중대한 도전이다. 많은 좌파들이 자본주의 국가와 이슬람주의를 대등하고 똑같이 위험한 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서방 제국주의 국가는 국제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떠받치고, 막대한 권력으로 억압과 파괴를 자행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이슬람주의를 대등하게 여기는 것은 이슬람주의에 맞서 자본주의 국가를 편드는 것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예컨대, 많은 이집트 좌파가 그런 입장을 취해 무슬림형제단에 맞서 엘시시의 반혁명 정부를 지지했다. 유럽에서 상당히 많은 급진좌파가 <샤를리 에브도>에 지지를 제공한 것은 소수자인 무슬림을 사실상 내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천대받는 자들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노동자 계급이 세계에서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을 제거하고자 싸우도록 성ㆍ종교ㆍ인종ㆍ국적을 떠나 단결하는 것을 고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테러리즘’ 전략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관한 구절이다.

우리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따른다. 이 전통은 마르크스ㆍ엥겔스가 페니언[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일종]과 논쟁하던 시절과 레닌ㆍ트로츠키가 나로드니키와 논쟁하던 시절부터 테러리즘을 정치 전략으로 삼는 것을 거부해 왔다. 우리가 공격의 표적으로 삼는 대상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이고 노동자 계급의 대중 행동만이 이를 타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지하드 집단은 이런 전략과 정반대인 전형적인 테러리즘 전략을 추구한다. 테러리즘은 엘리트 전사와 대중을 분리시키고 대중을 수동적인 상태로 남겨 둔다. 의심할 나위 없이 파리 살인극을 저지른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살인극에 대한 억압적 대응과 무슬림 혐오를 촉발해 더 많은 무슬림을 테러 단체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따라서 테러리즘 전략과, 지배계급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은 서로 공모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 2015년 1월 24일.


당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당원이었던 이언 버철(Ian Birchall)이 2005년에 쓴 세속주의란 무엇인가?.

세속주의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뜻하는 것이라면 나도 동의한다. 영국성공회는 국교(國敎)의 지위를 박탈당해야 하고, 신성모독죄는 폐지돼야 하고, 학교의 종교 수업은 역사와 사회 연구의 일부로서 다양한 종교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으로 대체돼야 한다. 비록 대다수 시민들이 이 문제들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국가 기관에서뿐 아니라 “공공영역”에서도 종교를 금지하고 싶어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있고, 그들의 정치적 실천에 신앙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친다. 무신론자들은 이를 개탄하지만,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는 개탄하기보다는 이에 대한 사회학적인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이런 영향력 자체를 우리가 막지는 못한다.

“종교에 몰입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핵무기를 가진 펜타곤의 기독교 광신도들이 무슬림 광신도들보다 훨씬 더 걱정스럽다. 하지만 똑같이 종교에 몰입해도 그들과 다른 경우도 많다. 마틴 루서 킹과 말콤X도 종교적인 믿음에서 동기를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공공영역”에서 배제돼야 하는 것일까? 나는 브루스 켄트[전 가톨릭 사제이자 사회운동가]와 많은 이견이 있지만, 반전 활동가라면 그의 지칠 줄 모르고 용감한 활동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내가 속한 노동조합 회의에 누가 와서 파업 대신 기도를 하자고 한다면, 나는 정중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신은 우리를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망할 CEO 놈들은 우리보다 몇십 배나 더 받습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박수를 치고 신학적 토론은 다음으로 미룰 것이다.

이언 버철이 10년 앞서 쓴 글이지만, 목수정의 글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기도 하다.

— 2015년 1월 27일.


<노동자 연대>의 기사 차별받는 집단에 대한 모욕이 언론의 자유인가?. 강조는 원글.

진리와 권리 등은 언제나 구체적 맥락을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 ‘자유’가 어떠니 하는 말이 나올 때는 항상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하려는 자유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적대 계급(들)만의 자유와 권리일 때는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판단 기준은 무엇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권리가 향상되는 것을 통해, 억압을 받는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권리가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5년 1월 27일.


<한겨레>에 실린 이라영의 칼럼 펜 뒤에 있는 총.

공화국의 가치가 늘 표현의 자유를 수호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은 상당히 위선적이다. 1961년 파리시는 알제리인에게 야간통행금지 조처를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비무장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사망자만 200여명에 이르는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끔찍한 알제리인 학살을 담은 다큐멘터리 <파리의 10월>은 1962년 만들어졌으나 이내 상영이 금지되었다. 학살 이후 무려 50년이나 세월이 흘러 2011년 10월에 공식적으로 극장 개봉을 했다. 어떤 분노는 ‘지금 당장’ 정치적 의제로 만들지만, 어떤 분노는 오랜 세월 묵살당한 뒤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는 시절이 오면 ‘과거의 역사’로만 소환한다.

이번 테러는 펜과 총의 격돌이 아니었다. 펜 뒤에는 더 많은 총이 지켜주고 있다. 이 총들의 지지를 받아 펜은 우아하게 문명이 되어 있을 뿐이다. 펜의 자유는 총이 가진 힘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된다. ‘말’의 자유를 수호하고 싶다면 그 말 뒤에 있는 힘의 불균형을 모른 척하면 안 된다.

— 2015년 1월 29일.


웹진 <북클라우드>홍세화 인터뷰. <ㅍㅍㅅㅅ>에 실린 인터뷰 스크립트를 인용한다.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며, 각국 정상들이 손잡고 파리에서 시위하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그게 얼마나 웃기는 것이냐면, 바로 그들이 이라크, 아랍에 폭격 등 공격을 도모하고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테러를 통해 똘레랑스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으로 입지를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 제대로 짚어내지 않고, 마치 유럽 사회가 테러 반대로 똘똘 뭉치고, 다 똘레랑스 있는 것처럼 형상적인 부분만 보도하고 있다. 이거 다 허위고, 허상이다. 실제 비판적인 분석이나 이런 기사들이 칼럼이나 이런 게 프랑스, 영국에서 나오고 있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되거나 하지 않는다.

샤를리 상황을 보자. 내가 보는 르몽드를 포함해, 마치 유럽 매체들이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런가? 유럽인 아닌 아시아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르몽드는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고 사설을 썼다. 그만큼 동일시가 된다. 그런데 부시가 이라크 침공했을 때 어떤 매체도 “우리는 이라크인인다”라고 쓴 곳은 없다.

무슨 뜻이냐? 절대 객관적인 게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 기울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잡힌 섬세한 시각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약자 자리에 끊임 없이 서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조금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 2015년 1월 30일.


“전문 통역사 천경록 씨가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그 여파를 놓고 최근 유럽의 몇몇 사회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눈 뒤 정리한 <노동자 연대> 기사 프랑스·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대응과 과제.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는 “혁명적 좌파의 대응이 사태 전개에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인종차별과 무슬림 혐오 공세에 이용됐는데, 급진 좌파의 극히 취약한 대응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극소수 좌파만이 ‘내가 샤를리다’ 구호에 반대했고 꽤 많은 급진 좌파들이 1월 11일 “공화주의 행진”을 지지했다. 반자본주의신당 NPA는 이 행진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무슬림 혐오에는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진 불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아주 모순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먼저, <샤를리 에브도> 사태 전부터 무슬림 혐오 세력의 위협적인 준동이 있었다. (…)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이에 대항하는 시위도 등장해 뮌헨에서 2만 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벌어졌다. 독일 좌파 내에서 우익이 이를 이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이런 위기감 때문에 독일 전역에서 12만 명이 인종차별 반대 행진을 벌였다. 2003년 반전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운동이다.

덕분에, 막상 우익은 샤를리 사태로 재미를 못 보고,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좌파의 대응이 정세를 주도하는 형국이다. 메르켈이 ‘무슬림은 독일 사회의 일부분’이라고 세 번이나 (처음으로) 강조해야 했던 것도 이런 압력의 결과였다.

— 2015년 1월 31일.


영국 <소셜리스트 워커>의 만평가 팀 샌더스(Tim Sanders)의 글 Satire should spear the powerful. 김종환 씨가 소개해주신 덕분에 읽었다.

풍자는 강자를 겨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풍자가 아니라 깡패짓일 뿐이다.

만화가는 공격적이어야 할까? 당연히 그렇다. 그게 우리 직업이다. 그러나 누구를 공격해야 할까? ‘어차피 우린 모두에게 무례하게 구는데 뭐가 문제야’ 하고 말하는 것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다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 2015년 2월 4일.


  1. 내 주변의 사회운동 활동가, 중·고등학교 동기들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되게 기분이 묘하다.
  2. 저 고유 링크(permalink)로 들어가면 목수정 씨가 글에 첨부한 사진만 나올 뿐 원글이 보이지 않는다.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며 직접 찾아야만 글을 볼 수 있다.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다. 페이스북의 문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