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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 무슬림을 방어한 레닌과 볼셰비키에게서 배워야 한다

오늘날 차별받는 종교 집단 중에는 이슬람교가 있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를 비롯한 상당수 나라의 좌파들은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보다 특별히 더 후진적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갖고 이슬람 혐오로부터 무슬림을 방어하길 거부한다.

이 점에서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의 실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인구의 10퍼센트, 약 1600만명이 이슬람교도였다. 러시아 정교회를 계급 통치의 무기로 사용한 차르 치하에서 이슬람교는 차별받았다.

1909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종교적 신념을 조금이라도 모욕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유물론에 대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다.

“오늘날 종교의 근원에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노동자들의 처지와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힘에 직면해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이 있다.”

그의 말대로 “억압받는 자들의 축제”인 혁명이 일어나자 무슬림들도 급진화했다. 1917년 5월 1일에 열린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에서는 대의원 1000명 중 200명이 여성이었다. 여성의 정치적 평등, 일부다처제·퍼다(여성이 남성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의 별도 공간에 살거나 얼굴을 가리는 것) 종식 등이 결의됐다.

이후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러시아가 (반종교가 아닌) 비종교 국가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소유권은 폐기됐고 러시아 정교회가 맡았던 보육·교육·예식과 같은 기능들은 비종교적인 기관들로 사회화됐다. 그러나 모든 종교 단체는 청원을 통해 어느 건물이나 예배용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학교는 세속화했지만 반종교적이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는 널리 보장됐다. 차르가 약탈한 이슬람 기념물, 책 등이 반환됐다. 이슬람의 종교 기념일인 금요일이 중앙아시아 지역 휴일로 선포됐다.

이슬람 교리에 맞춘 ‘샤리아’ 법을 시행하라는 게 무슬림의 1917년 2월혁명 당시 요구였다. 내전이 끝난 이후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이슬람 법정이 소비에트 법정과 나란히 중앙아시아에 설치됐다. 그러나 돌팔매질, 손목 자르기 같은 잔인한 형벌은 금지됐다.

병행 교육 제도도 확립돼, 학생들은 일반 소비에트 학교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 중 다닐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슬람 운동은 좌우로 분열했고, 내전 당시 많은 이슬람 지도자들은 백군보다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 볼셰비키의 편에 섰다. 일부 무슬림은 공산당에 직접 가입했는데,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원 70퍼센트가 무슬림이기도 했다.

레닌은 압제자의 민족주의와 피압제자의 민족주의를 구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압제자의 종교와 피압제자의 종교를 구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 국수주의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위 ‘관습을 바탕으로 한 범죄’에 맞선 싸움을 선언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는 여성의 히잡을 강제로 벗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러시아혁명 초기에는 없던 모습이었다. 제노텔(여성부)의 초점에 히잡 벗기기는 없었다. 오히려 성급하게 히잡을 금지하는 것이 공산당의 이익을 해친다는 주장이 많았다. 1925년 우즈베크 제노텔이 말한 것처럼 “여성의 경제적·물질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여성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으로 여성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스탈린의 정책이 시행되자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심지어 돼지 지방을 무슬림의 입술에 바르거나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일도 벌어졌다. 백래시도 일어나면서 무슬림 여성들은 더 큰 위험에 처했다. 히잡을 벗은 여성들은 강간을 당하거나 친족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처벌 받은 살인자와 강간범들은 일종의 순교자 취급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정권의 공격은 오히려 이슬람을 강화했다. 스탈린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1950~1960년대까지 히잡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에서 독립한 1991년에 이르러, 우즈벡 정부가 허가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히잡은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빠르게 되돌아왔다.

안타깝게도 당시 초좌파들은 종교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바탕으로 스탈린의 정책을 도왔다. 이것이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러시아 국수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차별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한 덕분에 차별받던 무슬림의 지지를 얻었고, 무슬림은 진정한 혁명 운동과 대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