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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와의 첫 만남

나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사실 이는 한국에서 그리 흔한 취향은 아니다. 한국은 연간 커피 소비량이 400잔을 넘는, 커피를 아주 사랑하는 나라 중 하나이지만, ‘믹스 커피’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시는 건 에스프레소의 베리에이션(variation)이다.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음료인 아메리카노부터 해서, 우유를 넣은 라테와 카푸치노 등등 말이다. 브루드 커피(드립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믹스 커피가 아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압도 다수는 에스프레소 베리에이션을 마시는 듯하다.

Exceptional Expressions of Espresso
(다양한 에스프레소 베리에이션. 크게 보기)

아메리카노, 라테, 카푸치노, 플랫 화이트…. 에스프레소는 이 모든 것의 재료가 되는 음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스프레소를 ‘커피 원액’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명칭을 싫어한다. 에스프레소를 원액이라고 부르면, 마치 뭔가를 더하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음료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실 원액’을 물 없이 그대로 마신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느낄 당혹감을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실 원액’을 마시지 않지만, 에스프레소는 세계 각국의 여러 사람들이 매일 즐기는 하나의 고유한 음료다.

물론 ‘커피 원액’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는 간다.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대부분의 에스프레소는 매우 쓰고, 맛도 없기 때문이다. 우유나 물을 넣어야 마실 만해지니, ‘원액’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에스프레소가 다 그런 것은 아니며, 앞으로 맛있는 에스프레소에 대해 차차 소개해 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에스프레소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는 친숙해지기가 조금은 어려운 음료인데 말이다. 여기에는 특별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평범하지만도 않은 사연이 있다.

2012년, 나는 우울과 불안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2011년 말쯤에 시작된 우울증 때문에 나는 할 일을 모두 내팽개쳤고, 온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온종일 불안해서 잠자는 시간 아니면 도저히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돼버렸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기로 하고, 2012년 1월쯤이 되자 증세는 조금씩 나아졌다. 이제 집 밖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가 조금은 줄어들었고, 몇 번만 망설이고 나면 나갈 수는 있는 정도가 됐다. 하지만 일상 활동 중 상당수가 불가능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먼저 연락할 수 있는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로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집 밖에 나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앉아 낮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쯤에 집에 다시 들어가는 날이 계속됐다.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려면 당연히 무언가를 마셔야 했다. 처음에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자주 골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쓴 커피’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페에서 하루에 적어도 서너 시간씩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커피를 한두 잔 더 마시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디단 캐러멜 마키아토를 매번 고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단 음료만 계속 마시다간 당뇨병에 걸리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지는 단 하나, 아메리카노였다(스타벅스에서는 ‘오늘의 커피’라는 이름으로 브루드 커피도 팔지만, 당시 나는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아메리카노를 두세 잔씩 마시는 날이 반복됐다. 그때 커피는 단지 시간을 때울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 기분을 조금이나마 낫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우울증 치료 약물이었지만, 그래도 늘 가라앉는 기분을 카페인이 조금은 올려주었다.

아메리카노를 계속 마시게 되니, 호기심이 생겼다. ‘에스프레소는 어떨까?’ 아메리카노에 물을 타지 않으면 어떨지 궁금할 만도 했다. 그렇게 생애 첫 에스프레소를 스타벅스에서 마셨다. 첫 경험은 그리 좋지 않았다.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는 굉장히 쓰고, 몸서리치게 만들며, 설탕 없이는 도저히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당시 나는 에스프레소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한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에도 관심을 가졌다. 물론 “스페셜티 커피란, 생두의 재배부터 로스팅, 브루잉 등 모든 순간에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서 만든 특별한 커피”(한겨레)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에스프레소뿐만 아니라 … 스페셜티 커피에도”라고 말하는 데에는 엄밀히 말해 문제가 있다. 서로 겹치는 부분(스페셜티 에스프레소)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에 나는 스페셜티 커피에도 관심을 가졌다.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맛있으면 더 좋은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기를 잘 탔다. 201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서 스페셜티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스페셜티 커피를 마셔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페셜티가 굉장히 대중화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스페셜티 커피에 뭔가 ‘새로운’ 느낌이 남아있었기에 호기심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커피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때에 그런 환경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Brewed Coffee with Ice
(부산 온천장의 모모스커피에서 마신 생애 첫 스페셜티 커피)

한동안은 스페셜티 커피를 브루드 커피로만 마셨지만, 스페셜티 에스프레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다. 스타벅스에서 마시던 것과는 달랐다. 에스프레소도 잘 만들면 꽤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점점 아메리카노나 브루드 커피가 아니라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날이 늘어났다.

에스프레소의 매력은, 무엇보다 맛과 향이 아주 강렬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울증을 앓고 있던 내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우울증 때문에 모든 것에서 생기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는데, 그런 내게 에스프레소의 강렬한 맛은 시들어 있던 뇌를 깨우는 듯한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6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하다.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시는데, 십중팔구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나는 그 강렬한 맛과 향을 사랑한다. 앞으로 에스프레소를 중심으로 커피에 관한 글을 종종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