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순환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경쟁이 더 높은 생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 반박하며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경쟁의 본질은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이다. 당신이 실패해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 경쟁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경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실패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내가 연애에서 겪는 문제 또한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 어찌하든 나는 마음속에서 ‘경쟁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질투와 불안, 초조함의 연속. 그 ‘경쟁자’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에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어떻게 하면 그 ‘경쟁자’를 제칠 수 있을까가 내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이는 확실히 도착적이다. 내가 ‘경쟁자’보다 앞선다 해서(그런데 도대체 무엇에서?), 혹은 ‘경쟁자’가 제거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매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상대가 실패하는 것에 더 집중한 결과, 난 경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사랑에는 늘 실패해왔다.

왜 이런 것일까?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라는 상투적인 답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답에 또다시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는다는 데 있다.

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청소년의 눈으로 입시경쟁 바라보기

똑같은 가면을 쓰고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

입시경쟁, 그 끔찍한 이름!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구나. 나도 자유로운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현실은 너무 달라. 상상 이상으로 너무 달라. 공부 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 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 공부, 공부, 공부. 좁디좁은 교실에 선풍기 4대 히터 2대. 40명이 넘는 아이들…. 같은 곳에서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 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 법’.”
– 2007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中.

매년 들려오는 청소년들의 ‘성적비관 자살’ 소식. 더 이상 이런 소식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 때문에 자살하고 있죠. 사실 자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자니 왠지 혼자서 호들갑을 떠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은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끔찍한 일이에요. 굳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한국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입시경쟁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다들 알고 계실 거에요. 다른 나라 학생들은 오전 8시에 등교해서 오후 1시에 집에 가는데, 오전 7시에 등교해서 오전 1시에 집에 가는 한국 학생들…. 2003년 1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환경이 아동(유엔은 ‘아동’의 개념을 18세 미만인 자로 규정하고 있어요.)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개선하라고 권고했죠.

한국의 학교들은 입시준비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교육을 위해 입시가 있는 게 아니라 입시를 위해 교육이 있는…. “경쟁에서 이겨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라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급훈으로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말이 버젓이 걸리는 학교. 그러고도 사람들은 “공교육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따위의 소리를 하곤 합니다. 이미 ‘교육’은 죽어버리고 없는 데,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된다는 그 ‘공교육’이란건 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경쟁력’을 생각하기 전에, 그 속에서 죽도록 불행한 청소년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입시경쟁은 학교 내 다른 인권침해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까 머리는 무조건 짧게 깎고, 공부 못하니까 맞아야 하고, 휴대폰은 압수!” 이런 식이죠. ‘강제’적인 ‘자율학습’의 문제도 있겠네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강제자율학습’만 문제인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사라지지 않은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자율학습’만 ‘진짜 자율’이 된다고 해서 과연 청소년들이 강제적인 학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에요. ‘자율학습’이 ‘정말로 자율적인’ 일부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그들 중 방과 후에 진정 입시공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청소년이 얼마나 되나요? 방과후에도 청소년들은 여전히 학원을 전전하고, 결국 그것은 학교에서의 ‘강제자율학습’과 마찬가지이죠. 어느 누구도 좋아서 자발적으로 입시학원에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입시경쟁 속에서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강제학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인생은 끝없는 경쟁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러한 입시경쟁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도 많아요. “모두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입시경쟁이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주장하며, 청소년기의 ‘짧은 순간’을 희생해 입시경쟁에 ‘헌신’할 것을 요구해요. 그러나 이는 기만일 뿐입니다. 입시경쟁에는 늘 ‘패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입시경쟁에서 ‘승리’한 청소년들, 소위 명문대에 들어간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볼 수 있나요? 성적이 상위권인 청소년들은 대개 가정과 학교의 요구와 압박으로 인해 입시경쟁의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많죠.

그 모든 전쟁에서 너희들이 만든 그 모든 전쟁에서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다쳐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얻었지
폐품이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고마운 자유도 얻었지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 정윤경, ‘시대’ 中

게다가, 중요한 것은 성적이 상위권인 청소년들도 입시경쟁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고 직업을 갖게 된다는 것이에요. 소위 말하는 ‘돈 많이 벌고 권력있는’ 직업을 갖는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고 좋아질 수 있을까요? 비록 그들 대부분이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이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도,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입시경쟁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는 ‘노예의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 큰 불행이죠. 입시경쟁 시스템 속에서 ‘승자’는 없어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

더 뻔뻔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인생은 어차피 끝없는 경쟁이다. 무조건 참아라.” 분명 한국 사회에는 입시경쟁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쟁들이 존재합니다. 취업경쟁이라던지, 직장 내 승진경쟁이라던지…. 하지만 그 경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쟁을 하려 했던 것 아니었던가요? 끝없는 경쟁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런 경쟁은 그만둬야 합니다. 참아야 할 게 아니죠. 신체의 고통을 계속 참고만 있는다면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처럼, 경쟁의 고통 또한 마찬가지에요.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노예’가 되어버린지 너무 오래라 경쟁을 왜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듯합니다.

입시제도를 손보면 괜찮아질까?

어떤 사람들은 입시제도를 조금 손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수를 늘리면 된다느니, 내신위주로 하면 된다느니, 수능만으로 대학가게 하면 된다느니, 대학에 자율로 맡기면 된다느니 하는 사람들 말이죠. 지난 수십 년간 입시제도를 얼마나 많이 ‘손봐’왔는지! 그런데 어째서 입시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기만 하는거죠?

누구나 ‘명문대’에 가려 하고, ‘명문대’에 가지 못하더라도 ‘조금 더 나은 대학’을 가려고 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명문대’니 ‘더 나은 대학’이니 하는 건, ‘그 대학의 수업이 얼마나 좋은가’ 같은 것이 아닌, ‘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는가’ 따위로 따져요. 그러니 입시제도를 어떻게 손보든, 뭔가 소용이 있기는 커녕 더 치열해지기만 하는 거죠. 대학에 들어가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명문대’에 들어가는게 어려운 거니까. ‘명문대’의 수는 한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모두들 ‘명문대’에 들어가고 싶어하니 말이죠.

그러니까 ‘입시제도를 어떻게 손보는가’가 중요한게 아니에요. 입시경쟁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지,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 ‘어느 정도 할만한’ 입시경쟁 따위는 있을 수가 없어요. 경쟁이 치열해질 수 밖에 없죠.

대학평준화? 좋은 방법이긴 하다만, 글쎄….

입시경쟁을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대학을 평준화시키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든 대학이 같은 교육여건을 갖추게 하고, 자격시험에서 일정 수준 이상만 넘으면 어느 대학이나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거죠.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의 대학들이 이처럼 평준화되어 있어요. 대학입시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것이니, 입시경쟁은 없어지겠죠. 여태까지 나온 입시경쟁에 대한 ‘해결책’들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해요.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어요.

첫 번째로, 특정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 직업 간의 임금이나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돈 잘 벌고 권력을 얻기 쉬운’ 특정한 학과에 많은 학생들이 몰릴 가능성이 크죠. (예를 들어 의과대학이나 경영대학.) ‘입학은 자유지만 졸업은 어렵게’ 만들어서 그런 문제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졸업을 위한 살인적인 경쟁을 불러 오지 않을까요? ‘대학평준화’를 하는 것과 동시에, 직업 간의 임금과 권력 격차를 줄이는 ‘직업평준화’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죠.

두 번째로, ‘엘리트 학교’가 만들어질 경우. 프랑스의 경우 대학(Universités)이 평준화되어 있긴 하지만, 그랑제꼴(Grandes écoles)이라고 해서 특정 분야(공학, 경영)의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따로 있어요. 만약 대학이 평준화되더라도 이러한 ‘엘리트 학교’가 생긴다면, 과연 입시경쟁이 사라질까요? 이러한 ‘엘리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또다시 시작되겠죠. 보나마나 ‘엘리트 학교’들이 다루는 분야는 공학과 경영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분야들로 확대될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대학평준화가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 또한 문제죠. ‘(이미 시행되고 있는) 고교평준화가 나라를 망친다’느니 하는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평준화에 반대할 것이란건 뻔한 사실이죠. 만약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게 과연 문제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요? 아니,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긴 할까요?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시위하는 사람들

중요한 건 청소년의 직접행동

시험 = 굴종, 사회적 지위향상, 위계적 사회.
우리는 사람이 구조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구조가 사람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바라는 생각을 실천하라.
나를 해방시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게.
내 똥구멍이나 개혁해라.
– 68혁명의 낙서들

앞서 말했던, 대학이 평준화된 나라 중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68혁명’이 시작된 나라입니다. ‘68혁명’은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질서, 사람들의 창의성을 빼앗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청소년과 청년들의 반란”이었어요. 1968년 5월,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외쳤죠. 사회의 모든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것들을 허물기 위한 혁명.

비록 ‘68혁명’은 그들이 원하던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로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대학평준화도 그 중 하나에요. 그 당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국유화하라”고 주장하며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 끔찍한 입시경쟁을 없애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야 해요. ‘남이 바꿔주는’ 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수많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나서서 행동한다면, 꼭 대학이 평준화되지 않더라도, 입시경쟁은 없어지겠죠. 하지만, 청소년들이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갖겠다는 욕망에 빠져 ‘노예의 길’을 택한다면, 경쟁에서 낙오돼 비참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다면, 입시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질 것이고,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청소년들의 소식도 점점 늘어만 갈 겁니다.

거리로 나와 저항하는 청소년만이, 쇠사슬을 끊을 수 있어요.
청소년의 직접행동만이, 입시경쟁을 없앨 수 있습니다.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서태지, ‘교실 이데아’ 中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가제)에 실릴 글. 淺學菲才(천학비재)에도 不拘(불구)하고 拙稿(졸고)를 上梓(상재)하니 江湖諸賢(강호제현)의 忌憚(기탄)없는 叱正(질정)을 仰望(앙망)하는 바이다. 아, 이 말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웃음) 아낌없는 비판 바랍니다.

입시 공화국의 종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내가 합격한 학교에 갔던 나는 그날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외국어고등학교. 나는 원래 그곳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웹 퍼블리셔가 되고 싶었고, 그곳에 가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 살고 있던 나는, ‘서울, 경기도 중학생’만 받는 그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2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전학을 가야 했다. 부모님께선 반대하셨다. “네 생각은 알겠지만….”으로 시작하신 부모님의 말씀은, “…아직도 이 나라에선 학벌을 무척이나 따진다. 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사회의 낙인을 뛰어넘을 수 있겠니?”로 끝났다. 결국,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작년 여름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어떻게 외국어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말이 길어진다. 부모님이 가라고 하셨냐고?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잠시 말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부모님도 더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프랑스에 가고 싶었다. ‘이 나라에선 희망이 보이질 않아서’였다고 해야 할까? 내가 과연 웹 퍼블리셔로 계속 먹고살 수 있을까, 아니 40대까진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비정규직이 60%에 육박하는 이 나라에서 과연 무슨 일을 하든 정규직으로 살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무척이나 비관적인 사람이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무슨 ‘모든 일이 해결될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프랑스에 가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면, 훨씬 더 나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프랑스에 가고 싶었다. 2006년 초에 있었던 학생 시위. 그런 시위가 가능한 국가라는 사실이 나를 유혹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프랑스는 많은 것으로 나를 유혹했지만.)

그래서 나는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간 뒤, 주말에 프랑스어학원을 다니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프랑스로 유학.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는 좌절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의 계획을 뒤집어 생각했다. ‘외국어고등학교에 가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동시에 컴퓨터 실력을 쌓자.’ 아마 그 뒤집힌 계획에는 ‘일반계 고등학교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지금도 별로 가고 싶지 않다.)

부산에 있는 한 외국어고등학교에 합격하고 나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나는 그날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산 최고 명문고등학교에 합격한 여러분을 축하합니다’라는 특목고 전문학원의 현수막을 본 이후부터였다. 별생각도 않은 채 덜컥 지원하고, 맹목적으로 두 달간을 달려왔던 나였다.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후회를 했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후회가 들기 시작한 것은 학교 입학 후부터였다. 입학하기 몇 달 전, ‘입시경쟁 반대’를 외치는 청소년 인권단체에 가입했기 때문이었을까? ‘전국 10위권 내 학교’라는 학교장의 말이 거슬렸다. 친구들은 그 말을 ‘말도 안된다’며 비웃었지만, 그래도 ‘부산에선 어느 정도 순위권에 드는 학교’라는 생각은 다들 가진 듯했다. (특성화 고등학교이긴 하지만)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려 했지만 가지 못하고 이곳에 왔기 때문이었을까? 실업계 고등학생들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비웃음도 참기 어려웠다. 나는 점점 후회하기 시작했다.

‘가출을 해서라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편입할까?’라는 생각을 3월 한 달 내내 했다. 하지만, 부산에 사는 내가 과연 편입을 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고, ‘이왕 온 것, 그냥 다니자’라는 마음속의 소리도 나를 유혹했다. 결국, 어영부영하다 편입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점점 변해가고 있다. 나도 이젠 ‘부산에선 어느 정도 순위권에 드는 학교’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아직은 그에 대한 거부감이 더 많이 느껴지지만, 점점 나도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같이 웃음을 짓곤 한다. 웹 퍼블리셔라는 꿈도 흔들리고 있다. 교육노동자,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름의 거창한 이유를 대지만, 그것이 과연 내가 진정 바라는 꿈일까 묻는 물음에 할 대답이 없다. ‘공무원’이 장래희망이라는 아이들과 내가 과연 무엇이 다른가 생각을 한다. 나는 과연 ‘교육에의 열정’ 때문에 교사가 되고 싶어 하는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갔다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겠지?

친구들이 공부를 하는 것을 보면 불안하다. 나는 늘 놀고만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나는 불안하다. 내가 과연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나는 결국 ‘입시 공화국’에 완전히 적응해버리고 말 것인가.

‘입시 공화국의 종말’을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심 ‘고교등급제’를 바라는 나는 분명히 위선자다. 나는 이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차고 나가고 싶지도 않다. 내가 요즘 괴로운 이유다.

입시 공화국의 종말

은빛늑대님의 이벤트를 위해 쓴 글. 어찌하다 보니 또 푸념이구나.
나는 이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