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는 무슬림을 방어한 레닌과 볼셰비키에게서 배워야 한다

오늘날 차별받는 종교 집단 중에는 이슬람교가 있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를 비롯한 상당수 나라의 좌파들은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보다 특별히 더 후진적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갖고 이슬람 혐오로부터 무슬림을 방어하길 거부한다.

이 점에서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의 실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인구의 10퍼센트, 약 1600만명이 이슬람교도였다. 러시아 정교회를 계급 통치의 무기로 사용한 차르 치하에서 이슬람교는 차별받았다.

1909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종교적 신념을 조금이라도 모욕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유물론에 대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다.

“오늘날 종교의 근원에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노동자들의 처지와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힘에 직면해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이 있다.”

그의 말대로 “억압받는 자들의 축제”인 혁명이 일어나자 무슬림들도 급진화했다. 1917년 5월 1일에 열린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에서는 대의원 1000명 중 200명이 여성이었다. 여성의 정치적 평등, 일부다처제·퍼다(여성이 남성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의 별도 공간에 살거나 얼굴을 가리는 것) 종식 등이 결의됐다.

이후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는 러시아가 (반종교가 아닌) 비종교 국가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소유권은 폐기됐고 러시아 정교회가 맡았던 보육·교육·예식과 같은 기능들은 비종교적인 기관들로 사회화됐다. 그러나 모든 종교 단체는 청원을 통해 어느 건물이나 예배용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학교는 세속화했지만 반종교적이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는 널리 보장됐다. 차르가 약탈한 이슬람 기념물, 책 등이 반환됐다. 이슬람의 종교 기념일인 금요일이 중앙아시아 지역 휴일로 선포됐다.

이슬람 교리에 맞춘 ‘샤리아’ 법을 시행하라는 게 무슬림의 1917년 2월혁명 당시 요구였다. 내전이 끝난 이후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이슬람 법정이 소비에트 법정과 나란히 중앙아시아에 설치됐다. 그러나 돌팔매질, 손목 자르기 같은 잔인한 형벌은 금지됐다. 

병행 교육 제도도 확립돼, 학생들은 일반 소비에트 학교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 중 다닐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슬람 운동은 좌우로 분열했고, 내전 당시 많은 이슬람 지도자들은 백군보다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 볼셰비키의 편에 섰다. 일부 무슬림은 공산당에 직접 가입했는데,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원 70퍼센트가 무슬림이기도 했다.

레닌은 압제자의 민족주의와 피압제자의 민족주의를 구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압제자의 종교와 피압제자의 종교를 구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 국수주의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위 ‘관습을 바탕으로 한 범죄’에 맞선 싸움을 선언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는 여성의 히잡을 강제로 벗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러시아혁명 초기에는 없던 모습이었다. 제노텔(여성부)의 초점에 히잡 벗기기는 없었다. 오히려 성급하게 히잡을 금지하는 것이 공산당의 이익을 해친다는 주장이 많았다. 1925년 우즈베크 제노텔이 말한 것처럼 “여성의 경제적·물질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여성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으로 여성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스탈린의 정책이 시행되자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심지어 돼지 지방을 무슬림의 입술에 바르거나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일도 벌어졌다. 백래시도 일어나면서 무슬림 여성들은 더 큰 위험에 처했다. 히잡을 벗은 여성들은 강간을 당하거나 친족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처벌 받은 살인자와 강간범들은 일종의 순교자 취급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정권의 공격은 오히려 이슬람을 강화했다. 스탈린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1950~1960년대까지 히잡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에서 독립한 1991년에 이르러, 우즈벡 정부가 허가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히잡은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빠르게 되돌아왔다.

안타깝게도 당시 초좌파들은 종교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바탕으로 스탈린의 정책을 도왔다. 이것이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러시아 국수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차별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한 덕분에 차별받던 무슬림의 지지를 얻었고, 무슬림은 진정한 혁명 운동과 대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독자편지.

‘카트’(식물잎)를 이유로 예멘 난민 불인정 결정: 난민들에게는 죄가 없다

10월 17일 정부가 제주 예멘 난민 심사 2차 결과를 발표했다. 단 한 명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339명에게 ‘인도적 체류’ 지위만 부여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받지 못한 34명도 있다.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은 것인데, 그 중 4명은 약물 검사에서 카트(Khat)가 검출돼서 불인정 결정을 받았다. 이 4명은 현재 경찰 수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언론들은 이 4명에 대한 선정적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받은 예멘 난민들도 카트를 씹을지도 모른다며, “카트에 취해 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겠느냐고 호들갑이다.

하지만 카트는 예멘에서는 합법인 식물이다. 예멘, 지부티, 케냐,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에서 카트는 합법이다. 특히 예멘에서는 술이 금지돼 있다 보니 그 대체제로서 오락용으로 카트를 허용해 준 성격이 강하고, 그러다 보니 예멘 남성의 80퍼센트 정도가 카트를 사용한다.

게다가 카트는 술이나 담배에 비해서도 훨씬 의존성과 독성이 낮은 ‘소프트 드럭(soft drug)’으로 분류되며, 환각 작용이 있긴 하지만 약하다. 즉, 대마초와 비슷한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카트에 취해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한국 정부는 모질게도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합법이기까지 한 카트를 씹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약류 관리법 위반으로 처벌까지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언론은 온갖 선정적인 보도를 퍼뜨리며 난민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려 한다. 이미 인종차별적 우익들이 언론 기사를 퍼나르며 난민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예멘 난민들에게는 죄가 없다. 정부는 난민 불인정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독자편지.

기독교 목사가 들려 주는 이슬람 혐오 반대 이야기

얼마 전 난민 500여 명이 예멘에서 제주도로 입국해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우익들은 난민 배척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난민 배척 선동의 가장 큰 근거가 바로 ‘이슬람 혐오’이다. 이슬람교에 대한 온갖 악선동이 난무하고 있다. 악선동을 노골적으로 퍼뜨리는 우익이 아닐지라도, 이슬람교에 대해 여러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예멘 난민들을 수용하는 데서도 반대 목소리를 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김동문 지음 | 선율 | 2017년 | 264쪽 | 15000원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는 난민을 환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금 읽기 좋은 책이다. 저자는 여러 아랍 나라에서 25년 넘게 거주한 개신교 목사이다. 이렇게 흔치 않은 배경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획일체가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게 중요하다. 저자도 무슬림의 범위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지적하며 책을 시작한다.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난 구성원들은 날 때부터 저절로 무슬림”이 되며, 법적으로도 무슬림이다. 그렇기에 이슬람 신앙에 무관심할지라도, 심지어 무신론자일지라도 무슬림일 수 있다. 따라서 개신교 우익의 과장과 달리, 무슬림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수치에도 허수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슬람교의 다섯 가지 기본 의무를 모두 실천하는 무슬림도 많지 않다.

이슬람교는 폭력적이라는 주장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반박한다. 이슬람 혐오론자들 중에서는 간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그렇지만 테러 사건 대부분이 무슬림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인종혐오의 표출일 뿐”이다. 1970년에서 2012년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2400건 중 60건만이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저지른 것이었고, 2011년부터 2015년 사이 유럽연합에서 일어난 테러 중 2퍼센트만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테러였다.

이슬람교는 그 자체로 여성 차별적이라는 주장도 옳지 않다. 여성 할례는 이슬람교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오래된 악습이며, 대다수 이슬람 법학자들은 이를 금지한다. ‘집단 강간 놀이’라고 소개되는 ‘타하루시(가마이)’는 실은 집단 따돌림, 성희롱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이슬람 국가 그 어느 곳에서도 성폭행이 문화나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히잡 착용은 무슬림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고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며, 모든 무슬림이 여성의 히잡 착용을 무슬림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저자는 한국에서 개신교 우익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여러 ‘이슬람 괴담’을 세세히 반박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슬람 혐오가 도대체 왜 퍼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슬람 혐오는 유럽과 북미 등 여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더 강력하게 퍼져 있다. 서방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여 온 제국주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오늘날 경제 위기의 속죄양을 만들고, 노동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서 이슬람 혐오가 체계적으로 유포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긴급 지원 활동을 하고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거짓이라고 폭로하는 책을 펴냈다. 그래서 이슬람 혐오와 제국주의의 상관성을 알 듯한데, 이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저자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세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면에서, 이 책은 이슬람 혐오에 반대하는 논리를 탄탄하게 쌓을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이슬람 혐오에 맞서 예멘 난민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환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서평 기사.

‘할랄 푸드’ 반대는 ‘동물 복지’를 위한 것인가?

나는 무슬림 친구가 여럿 있다. 그러다보니, 함께 밥을 먹을 때 ‘할랄 푸드’인가 아닌가를 신경 쓰게 된다. ‘할랄’은 아랍어로 ‘허용된’이라는 뜻이며, 이슬람 율법에 따라 먹는 게 허용된 음식을 가리킨다. 반대말은 ‘허용되지 않은’이라는 뜻인 ‘하람’이다. 돼지고기가 대표적인 ‘하람 푸드’이다.

소·양·닭 같은 고기는 이슬람식 도축법인 ‘다비하’에 따라 도살해야 할랄로 인정된다. 다비하에 따르면 도축을 할 때는 가축의 머리를 메카 방향으로 놓고 기도를 한 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날카로운 칼로 목을 한 번에 긋고, 피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할랄 푸드가 이슬람 혐오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마치 히잡처럼 말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기독교 우익들이 동성애 차별과 함께 이슬람 혐오를 자주 써먹는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이 “할랄 단지를 조성하면 무슬림 30만 명이 거주하게 돼 대한민국이 테러 위험국이 된다”는 허위 주장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기독교 우익들은 유럽에서의 이슬람 혐오 논리를 여러모로 차용하고 있기에, 유럽의 할랄 푸드 관련 논쟁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전선의 지도자 마린 르펜이 “파리의 모든 육류는 할랄”이라고 주장하며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고자 했다. 파시스트가 아닌 주류 정치인들도 이를 거들며 파시스트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 사르코지도 르펜과 비슷한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영국에서도 보수당 정치인들이 사람들이 할랄 육류를 피해서 먹을 권리가 있다며 할랄 의무 표시를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곤 한다.

유럽 사정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육류가 할랄’이라는 주장이 왜 이슬람 혐오와 연결돼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육류가 할랄이든 아니든 간에 비무슬림에게는 겉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슬림은 할랄 마크가 표시돼 있지 않은 육류는 먹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표시가 안 돼 있는 육류에 의무 표시를 하라니?

특히, 유럽에서는 주로 ‘동물 복지’ 문제로 할랄이 다뤄지기 때문에 진정한 맥락을 알아차리기 더 힘들다. 아마 다비하에는 가축이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현대적 도축은 훨씬 더 단번에 가축의 목숨을 끊는다. 그래서 다비하에 따르면 가축의 고통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할랄 푸드나 (비슷한 방식으로 도축을 규정한) 유대교의 코셔 푸드에는 ‘동물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많은 도축장들이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아도) 이슬람식 도축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모든 육류가 할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첫째, 도축장들이 비용이 적게 드는 도축법을 따르는 것은 무슬림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윤 논리 때문이다. 둘째, 비용 절감이 최우선이므로 현실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 도축장 크기를 줄여 비용을 줄이려다 보니, 도축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가축이 도축 장면을 보게 되거나,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는 가축을 발로 차는 등의 행동을 하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어긋나며 할랄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다른 모든 사상과  마찬가지로 역사·사회적 산물이다. 종교의 율법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돼왔고, 계속 해석이 변화한다. 오늘날 유럽의 할랄 도축장들은 ‘동물 복지’를 위해 칼로 목을 긋기 전에 미리 가축을 기절시키는 경우가 많다. 2013년 영국 식품표준청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 내 할랄 도축장에서 도축된 가축의 88퍼센트가 기절 상태에서 도축됐다.

따라서 할랄 푸드와 동물 복지 논쟁은 이슬람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가림막인 경우가 대다수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파시스트 깡패들이 할랄 푸드 상점을 습격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여기에는 인종에 대한 증오범죄로 처벌 받는 걸 피하려고 ‘동물 복지를 위한 정당한 항의’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경우까지 있다!

물론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다비하는 동물 학대와는 거리가 멀다. 또, 무슬림 ‘인간’보다 ‘동물’의 권리를 앞세우려 하면 의도치 않을지라도 한국 사회의 소수자인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긴다.

‘동물권단체 케어’는 2016년 초 박근혜 정부가 할랄 도축장 건설 계획을 내놓은 데 항의해 기자회견을 하며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리고 온라인 SNS로도 할랄 푸드에 대한 비판적인 동영상을 올렸다. 동영상에 달린 댓글만 보더라도, 마치 이슬람 혐오자들의 축제장같이 돼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할랄 도축장 건설 계획을 내놓은 건 ‘13억 무슬림 시장’을 위한 이윤 논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종교 내부의 계급적 분단을 봐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그 신자들의 처지와 생각이 모두 단일하지 않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 계급이라는 자본주의의 양대 계급 분단선은 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데 무슬림에 대한 지배자와 우익들의 비열한 공격에 맞서지 않는다면, 위축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경제·사회적 조건을 어떻게 개선할 것이냐 보다는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더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종교 안에서 보수적인 흐름이 더 득세하기 쉬워질 것이다. 할랄이 동물 복지의 적(敵)인 양 지배자들이 부추기다 보니, 오히려 그 반편향으로 도축 전에 미리 기절시키면 할랄이 아니지 않느냐를 두고 유럽 무슬림 커뮤니티 내에서 논쟁이 있기도 하다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 말과 더불어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종교에 맞선 투쟁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설교에 한정될 수 없으며, 그러한 설교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종교에 맞선 투쟁은 종교의 사회적 뿌리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급 운동의 구체적 실천과 연결돼야 한다.”

이 둘은 연결돼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억압받는 무슬림의 호민관이 돼야 하고, 동시에 노동 계급 무슬림이 자신의 종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이라는 구체적 실천과 연관 맺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독자편지.

난민 캠프에서 “요새 유럽”의 실상을 보다

지정학적 갈등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인한 전쟁이 여럿 벌어지면서, 전 세계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 2016년 전 세계 난민의 수는 6560만 명으로,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치였다. 신간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에서 저자 케이트 에번스는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의 난민촌에서 자원봉사하며 경험한 일을 그림으로 그렸다. 칼레는 난민들이 영국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난민을 한 명 한 명의 인간들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이 난민촌에서 하루하루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는지, 왜 영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 고향에서 어떤 고초를 겪다 탈출했는지 등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사연들을 보고 있자면, 난민을 6560만 명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삶으로서 볼 수 있게 된다. 칼레 난민촌은 2016년 철거됐는데, 책 후반부에 나오는 철거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케이트 에번스 지음 | 황승구 옮김 | 푸른지식 | 2018년 |184쪽 |18000원 

에번스는 유럽 각국 정부들의 위선도 폭로한다. 1997년 발효된 더블린조약에 따라 난민은 최초로 발을 밟은 유럽 국가에서 망명 신청을 해야 한다. 다른 국가에 중복 신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칼레의 많은 미등록 난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경찰에게 잡혀 사진을 찍히는 일이다. 그 사진이 증거가 돼 영국의 난민이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프랑스의 난민 인정률은 26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에번스는 자신이 만난 난민들의 사진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경찰이 이용할까 봐 걱정해서다. 

칼레 난민촌의 많은 난민이 영국에 친척이 있지만, 영국으로 건너갈 수 없다. 영국에서 조카를 데리러 온 삼촌은 영국 집에 조카 방까지 마련해 놨지만, 조카를 데려가지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유럽연합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는 선전은 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새 유럽’이라는 말로 상징되듯, 유럽연합은 바깥의 난민들에게는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많은 난민이 유럽연합 국가들이 연루된 제국주의적 전쟁 개입으로 정든 고향을 떠났는데도 말이다.

난민촌 환경도 매우 열악하다. 5000명이 화장실 24개를 나눠 써야 한다. 하수구도 없어 오염이 심한데, 아기에게 분유를 먹일 젖병을 위생적으로 소독하기조차 쉽지 않다. 국경없는의사회가 프랑스 정부를 고소했지만, 프랑스 법원은 “자원봉사자들이 음식을 제공하고 주거지를 마련하는 일을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당국이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판결했다! 난민을 외면하는 데서는 지배자들끼리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

에번스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벌이는 전쟁 탓에 난민이 생긴다는 것, 난민들이 유럽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도 설득력 있게 잘 보여 준다. 자신의 휴대전화로 온 우익들의 난민 비난 메시지를 만화 사이에 중간중간 넣어서 보여 주는데, 독자들은 난민들의 실제 모습을 보며 우익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유럽연합 지배자들이 왜 그토록 난민을 배척하는지에 관한 분석적 설명은 부족하다. 많은 지배자들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호황기에는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들였으면서(물론 그러면서도 인종차별을 부추겼다), 지금은 이주민을 배척하고 난민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경기 침체에서 10년째 벗어지 못하고 있는 지금, 각국 정부들은 사람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국경을 통제하며 자신들이 ‘국익’을 지키는 양 하려 한다. 저들에게 이주민은 사람들의 불만을 엉뚱하게 뒤집어씌울 좋은 희생양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국경은 배척을 부추길 뿐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사를 보라).

게다가 난민에 연대하는 움직임은 만화에서 자원봉사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에번스는 영국인인데, 영국은 올해 인종차별 반대 집회에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정도로 이주민에 대한 연대의 전통이 있는 나라다. 특히 앞서 언급한 칼레 난민촌 철거 때는 영국의 인종차별 반대 연합체 ‘인종차별에 맞서 일어서자’(Stand Up to Racism)가 칼레까지 찾아가 철거 저지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이들은 만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책은 난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입문용으로 읽어 보기에 좋은 책이다. 난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린 이 책을 보며 난민 문제에 충분히 공감하게 되고, 유럽연합을 비롯한 각국 지배자들의 인종차별적 난민 정책에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서평 기사.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국빈 초대, 어떻게 봐야 할까

11월 22일에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한국에 온다. 트럼프에 이은 문재인의 두 번째 국빈 초청이다. 미르지요예프 역시 문재인과 정상회담을 하고 국회에서 연설도 할 계획이다.

나는 우즈베크인 친구가 여러 명 있다. 기숙사 룸메이트로 함께 지내며 친해졌고, 초대를 받아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온 적도 있다.

그 중 한국에 다시 돌아온 한 우즈베크인 친구가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한국 사람들에게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북한에 관한 얘기로 착각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사실 북한이랑 조금 비슷한 것도 같다”고 덧붙였다.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 목화밭 강제노동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 중 하나니까 말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정부가 부과하는 목화 수확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목화 수확 철인 가을마다 아동들이 학교에 나가는 대신 목화밭으로 가서 강제노동해야 한다. 성인도 강제노동에서 예외는 아니라서, 공무원인 의사와 교사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병원과 학교가 문을 닫기도 한다. 이런 사정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돼서 그런지, 나는 단순 여행객이었는데도 사방에 널린 목화밭의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그 친구가 목화밭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그 친구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다. 대학이나 직장을 다니지 않는 한 원래 거주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원래 거주지가 아닌 지역에 직장을 잡는 것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운 일이다), 여행도 매번 신고해야 하며 일정 기간 이상 여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찰은 무척 부패한 데다가 사방에 깔렸기에, 틈만 나면 여권(신분증 역할을 한다)을 검사하려 들고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이것저것 트집을 잡기 일쑤다.

이슬람 카리모프 전 대통령이 무려 25년간 ‘통치’를 해왔다는 이야기도 했을까? 1991년에 집권한 그는 지난해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25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미르지요예프는 우즈베키스탄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카리모프의 정치적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르지요예프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13년간 총리를 지냈고, 카리모프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다가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친구는 카리모프 시절 벌어진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납치·고문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여전히 수감 중이다. 친구의 고향에서 10여 년 전에 벌어진 시위대 학살 사건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에서 수천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우즈베키스탄은 북한과 다르다.

우즈베키스탄은 미국 CIA가 ‘테러 용의자’를 심문할 비밀 시설을 제공해 왔다. 물론 CIA는 마음 내키는 대로 테러 용의자를 지목하고, 재판도 없이 구금·고문을 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한국 기업들이 꽤 많이 ‘진출’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강제노동으로 생산하는 목화는 한국 지폐 제조에도 사용한다. 한국조폐공사가 우즈베키스탄 최대 목화가공업체 지분의 65%를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35%는 포스코대우(옛 이름 대우인터내셔널) 소유다. 한국 외교부는 앞서 말한 대통령 카리모프가 죽었을 때 “위대한 지도자” 운운하며 애도를 표했고, 이명박은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 따뜻한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카리모프의 후계자 미르지요예프를 트럼프에 이어 두 번째 국빈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고 국회 연설 기회도 주겠다는 문재인도 이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이런 우호적 태도와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대조해 보면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한국 같은 그 협력자들이 북한을 ‘악마화’하는 건, 북한이 유일한 ‘악마’라서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북한이 써먹을 데가 많은 ‘악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는데 북한을 어떻게 써먹을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독자편지.

트럼프 방한 반대 집회 참가자로서 BBC World Service와 인터뷰

BBC World Service – BBC OS, Trump’s Towns: Hillsboro, Ohio (2017년 11월 13일까지 이용 가능)

BBC World Service에 트럼프 방한 반대 집회 참가자로서 인터뷰했다. 48분 38초부터. 찬성 집회 참가자와 나란히 실렸는데, ‘양쪽’ 의견을 나란히 싣는 걸 좋아하는 BBC의 성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북한으로 가라”고 서슴없이 내뱉는 천박한 자와 나란히 실리니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BBC 홈페이지에 올라 온 다시듣기는 1주일 뒤면 내려가기 때문에, SoundCloud에 클립을 올렸다.

I am Dongwook Kim, a college student majoring in children’s education in Seoul. I am against Trump’s visit to South Korea. I plan to attend a rally against Trump tomorrow because I want to show Trump “the fire and fury”—I quote this saying from Trump—of ordinary people in South Korea. Trump has heightened military tension on the Korean peninsula. Not only has he continued to pour out harsh words, but he also has run military demonstrations with the B-1B bomber and aircraft carrier. I don’t think the war will take place on the peninsula right now, but it is certain that it’s becoming increasingly dangerous. In particular, I’m angry at his saying, “If thousands die, they’re going to die over there(the Korean peninsula), not here(the United States).” I do not want to die on the battlefield. When Trump arrives in Korea, it is clear that he will pour more and more harsh words, so I’m against his visit. The Korean government has forbidden many rallies on the timing of Trump’s visit. I think this is not only a violation of democratic rights, but a declaration that the Korean government is on the side of war rather than peace.

저는 김동욱이고 서울에서 초등교육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입니다. 저는 트럼프의 한국 방문에 반대합니다. 저는 내일 트럼프 방한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할 계획인데 왜냐하면 트럼프에게 한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화염과 분노”(트럼프의 말을 인용한 것)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왔습니다. 험악한 말을 계속 쏟아내왔을 뿐만 아니라, B-1B 폭격기와 항공모함을 동원해 무력시위도 벌여왔습니다. 당장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점점 위험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기(한반도)서 죽는 것이지 여기(미국)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 분노합니다. 저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에 트럼프가 오면 한층 더 험악한 말을 쏟아낼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그의 방문에 반대합니다. 한국 정부는 트럼프 방문 시기 열리는 집회들을 여럿 금지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가 평화보다는 전쟁의 편에 서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