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시작하기까지

어떻게 해서 운동(movement)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크게 많은 걸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청소년 시기에 운동을 시작한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데는 수많은 사건이 배경으로 존재하겠지만, 열여덟 살 무렵부터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흔히 답하는 ‘요약본’이 있다. 모든 구체적인 내용을 다 담지는 못하지만, 핵심적인 내용만 담은 요약본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소위 말하는 ‘소극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과 논쟁은 상당히 좋아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학급회의 시간마다 ‘인터넷상에서의 올바른 언어 사용’ 따위의 주제를 들고 나와 토론을 걸어서 회의 같은 건 대충 빨리 끝내고 집에 가길 원하는 친구들을 괴롭혔다. 나는 그 당시 소위 ‘외계어’는 물론이고 ‘ㅎㅎ’나 ‘ㅋㅋ’ 같은 단자음만의 사용에 대해서도 반대(?)했었는데, 이를테면 보수주의 논객이었던 셈이다. (웃음)

보통 내가 답하는 ‘요약본’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당시 보수주의자(?)였던 나는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내 개인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을 위해(없겠지만) 재미삼아 덧붙이자면,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을 지지했고 그 해에 있었던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해 분개했지만 ‘Fucking USA’ 같은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생각에서라거나 그 노래에 담긴 민족주의적 정서가 마음에 들지않아서라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고, 그냥 ‘fuck’이라는 단어가 외설적이라는 생각에서.)) 중학교에 들어간 뒤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초등학교 때 머리를 길게 기른 적은 없었고 중학교의 두발 규정에 큰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매일 교문에서 두발규제를 받는 학생들을 보기가 괴로웠다. 꽤 자상했던 걸로 기억하는 도덕선생님이 ‘학생주임’의 위치로 교문에서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볼 때는 그가 마치 괴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도 했던 ‘운동장 조례’가 중학교 때는 별다른 차이도 없었는데 굉장히 숨 막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운동장 조례 때면 온 세상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지금 용기를 내어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날 무렵부터 나는 “내 속생각이 남들에게 다 들리는 것 같다.”라는 망상이 끊임없이 드는 망상증을 앓았었다. 물론 전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런 망상을 멈출 수 없었는데(그러니까 ‘망상증’인 것이지만), 이 망상증은 중학교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런 망상이 심해질 때가 운동장 조례였다.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였나,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박노자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인터넷에서 서평을 보고 우연히 사게 되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바로 도서관에서 박노자의 다른 책들을 빌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책은 내가 겪던 문제가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전체주의적 억압.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라는 이야기를 그는 처음으로 내게 들려주었다.

그 이후에도 물론 등굣길 두발검사는 견디기 어려웠고 운동장 조례 때마다 망상은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그의 책을 읽기 전과 후는 확연히 달랐다. ((이후의 내 ‘망상증’에 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는 계속되었다. 박노자의 책을 읽고 난 이후 확연히 나아졌긴 했지만 말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망상증은 거의 사라졌다. 가끔 스트레스가 심할 때 겪기는 하지만, 1년에 세네 번 정도이다. 매일같이 망상에 시달렸던 중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하면 무척 줄어든 것이다.)) 두발규제가 단순히 ‘두발규제’가 아니라는 것, 운동장 조례가 단순히 ‘운동장 조례’가 아니라는 것은 내게 무척 중요했다. 나는 그 이후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키워가기 시작했고, 진보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고, 민주노동당에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사회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이 블로그에도 꽤 남아 있다.), 당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던 해밀 님을 블로그를 통해 만났고, 나도 아수나로에서 처음 ‘운동’이라는 것을 서툴게나마 시작하게 되었다.

두발규제에 힘들어하고, 억압적인 학교에 대한 불만을 느끼는 청소년들은 많다. 그러나 대개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학생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에 뛰어들지 않는다. 차라리 6년, 혹은 12년을 참고 경쟁과 억압에서 어떻게든 버텨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그 모든 억압적인 것들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러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것들을 바꿔낼 수 있을 것이라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악순환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경쟁이 더 높은 생산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 반박하며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경쟁의 본질은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이다. 당신이 실패해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 경쟁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경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실패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내가 연애에서 겪는 문제 또한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 어찌하든 나는 마음속에서 ‘경쟁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질투와 불안, 초조함의 연속. 그 ‘경쟁자’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에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어떻게 하면 그 ‘경쟁자’를 제칠 수 있을까가 내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이는 확실히 도착적이다. 내가 ‘경쟁자’보다 앞선다 해서(그런데 도대체 무엇에서?), 혹은 ‘경쟁자’가 제거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매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상대가 실패하는 것에 더 집중한 결과, 난 경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사랑에는 늘 실패해왔다.

왜 이런 것일까?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라는 상투적인 답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답에 또다시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는다는 데 있다.

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2010년에 본 것들

  1.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녹색평론사
  2.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궁리
  3.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녹색평론사
  4. 『재현이란 무엇인가』, 채운, 그린비
  5.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사회평론
  6.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수영, 그린비
  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택광, 글항아리
  8.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후마니타스
  9. 『딥스』, 버지니아 M. 액슬린, 샘터사
  10. 『민중에서 시민으로』, 최장집, 돌베개
  11. 『거꾸로 달리는 미국』, 유재현, 그린비
  12.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산책자
  13.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강병호 외, 난장
  14. 『삶을 위한 국어교육』, 이계삼, 나라말
  15. 『내가 살던 용산』, 김성희 외, 보리
  16.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김민수, 그린비
  17. 『예스맨 프로젝트』, 마이크 버나노 외, 빨간머리
  18.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대리언 리더, 문학동네
  19.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 고경원, 아트북스
  20.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현실문화연구
  21.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22.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조셉 추나라, 책갈피
  23. 『정치신학』, 칼 슈미트, 그린비

신문, 잡지, 소책자 제외.

영화

  1. 친구 사이? (김조광수, 2009)
  2.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 2009)
  3. 이마 베프 (올리비에 아사야스, 1996)
  4. 반두비 (신동일, 2009)
  5. 경계도시 2 (홍형숙, 2010)
  6. 아이언 맨 2 (존 파브로, 2010)
  7. 바더 마인호프 (율리 에델, 2009)
  8. 하녀 (홍상수, 2010)
  9. 도쿄 택시 (김태식, 2010)
  10. 내 깡패 같은 애인 (김광식, 2010)
  11. 공자-춘추전국시대 (호 메이, 2010)
  12. 하녀 (김기영, 1960)
  13.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런, 2010)
  14. 뮬란: 전사의 귀환 (마초성, 2010)
  15. 카틴 (안제이 바이다, 2007)
  16. 땅의 여자 (권우정, 2010)
  17. 부당거래 (류승완, 2010)
  18. 소셜 네트워크 (데이빗 핀처, 2010)
  19. 클래스 (로랑 캉테, 2010)
  20. 스카이라인 (콜린 스트로즈/그렉 스트로즈, 2010)
  21. 헬로우 고스트 (김영탁, 2010)

2008년 이후 매해 본 책과 영화를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는데, 2009년에는 컴퓨터에 기록해둔 데이터를 연말 즈음에 날려 먹어서 글을 쓰지 못했다. 책은 이십여 권, 영화는 열 편 정도를 봤던 것 같다.

작년과 올해 모두 한 달에 책을 두 권 정도밖에 읽지 않았다. 작년이야 수능을 준비하는 처지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할 수 있겠지만, 올해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하루에 15시간 남짓한 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던 학교에서 책만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학교 밖으로 나오니 누릴 수 있는 낙이 여럿으로 늘어났기 때문일지도, 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하다. 소화하기 벅찬 책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다가 포기해버린 일이 잦았던 올해였다. 그런 책을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솔직하게 말하면 어느 정도의 허영심 때문이었지만, 돌이켜봤을 때 나는 ‘양보다 질’이라고 나 자신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백 장이에요? 너무 많아요.”
“뭐든 모으면 의미가 되거든.”

계림 언니는 질보다 양을 추구했던 쪽이 질적으로도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는 실험 얘기를 해주었다.

“어느 도예과에서 그룹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작품을 많이 해서 총합이 무거운 순서대로 점수를 준다고 했고 다른 쪽은 가장 잘한 것 하나만 내면 그걸로 평가를 한다고 했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무게로 점수를 준 쪽에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대. 머리로 고민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대신에 손이 가는 대로 많이 만들다보면 좋은 게 나온다는 얘기지.”

오늘의 할 일, 작업실. 자음과모음R 2010년 9/10월호 P195-196.

독서도 ‘질보다 양’인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책을 읽는 것은 많이 하지 않았을 때 반성을 하고 목표도 세우며 ‘일’처럼 여겼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딱히 보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재미삼아 하나씩 본 영화가 모이니 올해 읽은 책과 비슷한 수가 된 것이다. 책 읽기에 너무 의무감을 갖고 있진 않았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