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우성이 말하는 난민과 연대해야 하는 이유

배우 정우성이 책을 썼다. 자신이 직접 만난 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정우성은 2014년부터 유엔난민기구 명예사절로 활동하고서 2015년 6월부터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배우인 그가 공개적으로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면서 여러 비난으로부터 난민들을 방어하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난 난민들의 이야기를 더욱 널리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이 책은 네팔, 남수단, 레바논, 이라크, 방글라데시 등 저자가 방문했던 난민 캠프에서의 경험을 주로 다룬다. 난민 캠프의 열악한 환경, 전쟁과 박해를 피해 난민이 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집 앞 거리에서 아버지가 총탄에 쓰러졌지만 위험해서 이틀 동안 창 너머로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시리아 난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숨이 턱 막혔다. 어서 빨리 평화가 찾아와 난민들이 그리운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책은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 있었던 논란도 다룬다.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 하는 배우로서 당시 비난을 많이 받았을 텐데도, 정우성은 평소 난민 문제가 체감하기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는 “잘못된 정보와 엇나간 감정을 거두고 차분하게 눈을 맞추면서 대화해 나가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는 여러 오해를 정리해 반박한다.

무엇보다 이 논란이 생겨난 원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인상 깊었다. 수많은 댓글을 다 읽어보면서 저자는 사람들이 난민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삶을 우려하고 걱정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과 소득과 기본 생활을 제대로 돌봐 왔는지 묻”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난민 수용 반대 여론이 20대에서 높았다는 조사 결과를 ‘20대 보수화론’의 근거로 삼는 주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등록금, 취업, 결혼 뭐 하나 해결되는 것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원인이라고 옳게 지적한다.

우리 자신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난민을 도와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난민 지원이 무슨 이득이 되느냐는 질문에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난민 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슴 뭉클한 말이지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를 날려버린 퇴진 운동도 그 이전 철도 파업, 민중총궐기 등 노동자들의 투쟁이 누적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퇴진 촛불 시위에 노동계급 수십만 명이 참여했다. 노동계급은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고 있기에, 세상을 바꿀 힘 또한 있다. 

그렇기에 지배계급은 언제나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 한다. 국경 단속을 통한 이주민 차별, 난민 배척도 그중 하나다. 지배계급은 필요할 때는 난민·이주민들을 불러들이면서, 동시에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경제 위기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는 희생양으로 난민·이주민들을 이용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인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한 비밀이고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사실을 아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노동계급에게는 인도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난민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난민·이주민과 연대하지 않으면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지급하자’는 황교안 같은 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최저임금이 낮아지면 내국인 노동자들도 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고, 바닥을 향한 경쟁에 내몰릴 것이다. 이처럼 난민을 배척하는 것은 잠깐의 심리적 위안을 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고 ‘박탈감’도 커질 것이다. 난민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단결할 필요성을 아는 사람에게도 이 책을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책 전체가 왜 난민과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책을 덮으면서 나도 저자가 말한 “우리 모두가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는 보다 나은 세상”을 상상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같이하게 되길 바란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서평 기사.

히잡을 쓰는 무슬림 여성과 그 가족은 보수적일까?

내게는 무슬림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 그중 한 명은 알제리인 여성인데, 이 친구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공유하고 싶다.

알제리에서 히잡은 강제가 아니며, 실제로 여성의 3~4할 정도는 히잡을 쓰지 않는다. 알제리 사진을 보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친구는 히잡을 꼭 쓰고 다니며, 해수욕장에 갈 때는 부르키니를 입는다. 무슬림의 의무 중 하나인 하루 다섯 번의 기도도 절대 빼먹지 않는 독실한 신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가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것은 전혀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친구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대학 공부가 마무리돼가면서 몇 달 전부터는 일을 시작했다. 그 후 알제리에서 대중 항쟁이 일어나 대학이 무기한 휴교 중이기에 현재는 일만 하고 있다. 제약 관련 연구하는 일인데, 친구는 그 일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도시로 인사발령을 받게 됐다. 가족들이 전부 이사를 해야 했다. 친구는 가족들과 떨어지기 싫어서 일을 그만둘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에게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며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 혼자서만 그 도시에 머물러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걸 듣고는 정말 너 혼자 사는 것이냐고 여러 번 물어봤다. 한국에서도 젊은 여성 혼자서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것을 용납 못 하는 가정이 종종 있는데, 이슬람권에서 그게 가능할까 하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다행히도 내 편견 섞인 질문을 이해 못 한 듯했고, 앞으로는 혼자 살게 될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최근에는 더 놀라운 일도 있었다.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 친구의 아들, 그러니까 ‘엄친아’와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 ‘엄친아’는 독일에 사는 엔지니어라고 했고, 당연히 돈도 많이 버는 듯했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는 친구가 좋은 남자와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 하는데, 친구는 결혼하기 싫다고 했다.

사랑 없는 중매 결혼은 싫은가보다 하고 위로(?)를 했더니, 그게 아니라 ‘엄친아’의 가치관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여성이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꼭 일을 해야겠고, 따라서 그런 가치관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말은 이후에 있었다. 친구가 자신은 조만간 튀니지로 친구들과 여행을 갈 건데, 결혼을 안 하겠다고 엄마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터라 엄마가 여행을 반대하며 붙잡고 늘어질 테니, 일단 약혼을 해놓겠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약혼하면 무를 수가 없는데 어쩌겠다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은 이미 다른 약혼을 한 번 무른 적이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약혼을 두 번씩이나 무르고 나면 엄마도 자신의 가치관을 알고 포기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리고서 덧붙인 말이 인상 깊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뭐든지 할 수 있어(I can do anything I want).” 페미니스트들의 ‘소녀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라는 구호가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리고서 친구는 아버지는 이 다툼에서 자기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길 바라시며 응원해주고 계시니, 어머니 뜻대로 만은 못 할 거라는 것이다.

친구의 자취와 결혼 두 사례를 보면서 내 편견이 많이 깨졌다. 이슬람에 여성 차별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엄친아’처럼 여성이 집 안에만 있길 바라는 무슬림 남성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건 무슬림 남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친구의 아버지처럼 여성의 선택을 응원하는 무슬림 남성 또한 있다.

무엇보다 히잡을 쓴 여성이라고 해서 전통을 보수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친구의 사례를 들으면서 최일붕 씨가 프랑스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쓴 글이 생각났다.

“필자가 1994년 말쯤 읽은 국내 일간신문은 프랑스 〈리베라시옹〉 신문의 기사를 인용했는데, 그 기사는 프랑스 일부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것이었다. 히잡을 착용한 여성이라고 해서 전통을 보수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오히려 히잡 착용을 하지 않는 여성보다 진보적인 경우도 많았다. 즉,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것을 거부한다든지, 가정 바깥에서 직장을 구한다든지, 권리의 불평등을 성토한다든지 등의 태도를 보였다.”

https://wspaper.org/article/17336

친구의 사례는 정말이지 이를 잘 보여 주는 경우가 아닌가! 히잡을 늘 착용하는 여성이지만, 여러 면에서 진취적이고 진보적이다.

이 신문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이슬람 혐오로부터 무슬림들을 방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겠지만, 나처럼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체제가 강요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한 사례가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노동자 연대〉에 실린 독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