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산책을 하러 명륜동에 갔던 날,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후원을 받고 있었다. 2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후원을 할 생각이 없냐며 세이브더칠드런이 했던 활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설명을 했다.

그 남자는 NGO 단체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능글맞은 성격이었는데,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들었다. 지난 해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했던 ‘신생아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한 후, 그는 국내 결식아동지원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언짢았다. 한국은 “평소에는 점심 한 끼밖에 못 먹고” “방학이 되면 그마저도 끊기는” 아동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능력과 돈이 충분히 있음에도 단순히 그럴 의지가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을 개인의 선의와 후원으로 메우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후원을 하겠다고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설명을 듣고나서 20초 정도 망설이다가 — 직접 세어보면 이 시간이 얼마나 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대학생이냐고 물은뒤 그렇다고 대답하자 돈이 부족할 거라는 걸 안다며 5,000원만 후원해도 되며 특정 기간만 지정해서 후원해도 된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서야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신청서를 작성한 뒤 지하철역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며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이미 후원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더 후원하기에는 돈이 부족한데….’라는 생각 때문에 망설였던 내 자신의 변명이 정말 옳은 것인지. 그렇지 않았다. 5,000원은 학생식당 두 끼만 먹지 않아도 생기는 돈이었다. 사실 식사를 거른다거나 하는 걸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지난 1학기를 돌아보면, 나는 기숙사에 살지만 세 끼 전부를 학생식당에서 해결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샌드위치나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비싼 음식을 사먹는 경우도 많았는데, 5,000원이 넘는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값비싼 외식을 학생식당으로 딱 두 번만 대체한다고 해도 후원할 돈은 충분했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출근길마다 지나는 연못가에 어떤 아이가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바로 뛰어 들어가 구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빠져 죽고 말 것이다. 연못은 겨우 무릎까지 물이 차는 정도이니 물에 들어가기란 어렵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새 신발이 더러워지고, 양복이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며, 직장에 지각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모른척하고 내 갈 길을 갈 것이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렇다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일은 당연시하면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매일 2만 명 정도의 아이가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현실은 모른체 하는” 태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싱어는 이러한 태도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며,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다수보다는 특정 개인에,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보다는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 더 예민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 그러한 태도를 만들어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질 때 우리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악(惡)만큼 중요한 뭔가(이를테면 자식의 생명)를 희생하게 되기 전까지는 기부를 해야겠지만, 이러한 논리가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싱어는 개개인이 자신의 소득 5% 이상 기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그 정도만 기부한다면 세상의 빈곤을 송두리째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월 40만원의 용돈을 받고 있다. 친척들에게 받거나 이런저런 일로 버는 비정기적인 수입을 합하면 월 5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여태껏 그 중 4만원을 후원해왔는데, 세계의 굶주림과 질병을 해결하는 일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다른 일을 하는 단체들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1만원, 교육공동체 나다에 1만원, 진보신당에 5천원, 인권운동사랑방에 5천원,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1만원.

따지고 보면 나 또한 물에 빠진 아이를 모른척 하고 지나가고 있는 셈이다. 싱어의 책을 읽고 난 후, 세이브더칠드런 홈페이지에서 후원금액을 5천원에서 1만 5천원으로 올렸다. 직접 버는 돈도 아니면서 후원한답시고 이런 식으로 자랑스럽게(?) 글을 올리는 것을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리주의자인 싱어는 사람들이 돈을 내놓는 진짜 동기가 어떻든 간에 기부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므로 사람들이 기부 액수에 대해 더 공개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도 기부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이에 동감한다. 이 글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진보교육감 홍위병 아닙니다

5일 아침 “동아일보 1면에 아수나로가 실렸더라”는 믿기지 않은 소식을 시작으로, 아수나로는 지금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됐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보수 언론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언론들이 소위 ‘홍위병’을 운운하며 연일 아수나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을 내보내고 있는데, 이들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들이 진보교육감과 교육의원들에게 선동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수나로가 진보교육감 당선 이전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꾸준히 활발하게 활동해온 단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 언론들의 논조에는 문제가 많다. 이들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미성숙하며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의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경쟁을 거부하며 학생 인권과는 관계없는 정치적 이슈에 뛰어들고 있다.”

7월 7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이성호씨의 칼럼(학생이 평가 싫어 거리로 나선다고?)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수나로의 주장이 옳다면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든 종류의 평가는 물론 사회적으로 경쟁을 유발하는 어떠한 체제나 제도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평가=경쟁=인권침해’라는 등식은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수나로는 그러한 등식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수나로는 경쟁이 교육의 목적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고사라는 평가제도로 인해 초등학교까지 야자를 하는 등 학생들은 강제야자와 보충수업을 해야 하며 “목숨걸고 공부”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 과연 “학생들의 학습을 동기화하고 교육의 과정 전체를 점검”하기 위한 평가인가?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현실이니 학생들의 학습이 시험에 ‘동기화’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이러한 현실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일제고사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라고 말하기 이전에, 경쟁적 교육체제가 아동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한국에 개선을 권고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문(CRC/C/15/Add.197 2003년 1월)이나 먼저 읽어보길 바란다.

교원평가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반에 20명 이상 보충수업에 참여하게 해라. 교원평가에 반영하겠다”고 말한 교장이 벌써부터 나오는 등 교원평가가 학생들을 위한 것,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교원평가는 교장이 교사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에서 말하는 ‘공교육의 질 제고’나 ‘더 좋은 교육’이라는 건 더 강화된 입시교육과 말 잘 듣는 교육을 의미하지,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나 인권교육, 인성교육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원평가가 강제보충수업 등을 늘리고 반 평균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체벌하는 등 교사의 반인권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지금의 학교 현실과 보고되는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동기를 부여하거나 참여를 보장한다고 할 때, 그것을 점수 매기고 줄세우는 ‘평가’, ‘경쟁’의 방식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다. 학생과 교사가 좀 더 평등한 권력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고 대화하는 민주적인 학교와 수업이 지금의 교육의 문제점을 고치기에는 훨씬 낫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교장 선출에도 학생회가 참여하며, 학교 규정은 물론 심지어는 흡연을 허용할지 말지 여부조차도 학생회가 회의로 결정하곤 한다. 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 또한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과 교육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학생들이 왜 교육정책에 왈가왈부하냐는 식의 말이야말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인권은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였다. 지배자들은 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우리를 ‘홍위병’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애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홍위병’이라는 그 무례한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