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나로 서울지부에 느끼는

‘아수나로’에 문제가 많다며 ‘아수나로 서울지부’를 떠났던 몇몇 사람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는 딱히 ‘아수나로 서울지부’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 삼간 다 태운다’라는 속담이 여기에 어울리려나. 여튼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 되며, 그냥 여기에 적응 못하는 사람이 나가는 편이 낫다.

나는 빈정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면 한 마리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아수나로는 ‘운동 단체’이다.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기에 얼핏 보기에 이기적인 것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수나로 서울지부를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문제가 무엇인지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다들 이에 실패한 것 같다. 나 또한 이 문제를 또렷이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사실 그들이 겪은 문제가 내가 겪는 문제와 비슷한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실무 중심주의’라거나 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단어 몇 개로 내가 겪는 문제와 비슷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 이 문제가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해결하려 들어선 안 될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나는 (여태껏 그래왔듯) 가늘고 길게 활동하고 싶은데, 서울지부가 처해 있는 상황 탓인지 내가 (딱히 한 건 없지만) 활동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탓인지, 서울지부 사람들은 나의 이런 방식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 하는 듯 보인다.

글을 쓰다보니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내가 겪는 문제를 어쩌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을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마치 자본주의 하에서의 기업처럼 굴러가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의 특성상 또 다른 ‘실패’를 추가한 것일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욕설 비슷하게 받아들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의미라던가 폄하하거나 뭐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세상도 아닌데 사회주의적으로 행동하다간 멸종하기 딱 좋다. 물론 아수나로를 혁명조직이나 코뮌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욕설이겠지만, 나에게 아수나로란 그냥 ‘시민 단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겪는 문제란 명확해진다.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정말로 기업이라면, 나는 돈을 받으니까 문제를 겪는다 하더라도 (짤리기 전까진) 회사에 ‘출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수나로 서울지부는 기업이 아니고, 내게 돈을 주지 못한다.

물론 시민단체 활동은 대개 돈이 아니라 다른 가치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수나로 서울지부는 (나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나는 느낀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건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수나로 서울지부는 이미 충분히 주고 있고, 지금 상황에서 더 주려 하다간 그건 자살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 가능한건 ‘덜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1)(나처럼 받아야 하는게 많은 사람 말고) 조금 줘도 많이 일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를 늘리기. 2) 지금의 헌신적인 활동가들에게 생계를 보장하고, 그 대신 더 많이 일하게 하기(이건 ‘더 주는 것’과 연결되는데, ‘자살행위’라고 아까 말했듯 지금 이건 불가능하다.) 둘 다 무척 ‘비인간적’인 것이고, 자본주의 하에서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받아야 하는게 많은 이유는 아마 내가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기 때문일테고, 내 성격이 그렇기 때문일 테다. 어찌되었건 내가 “원하는만큼 일하고(a), 원하는만큼 받고 싶다(b)”고 주장하는건 아수나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떠난 사람들은 대개 a와 b를 동시에 요구했(던 것 같)고, 나는 a만 요구하고자 하는데(가늘고 길게 활동) 아까 말했듯 서울지부 사람들은 나의 이런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좀 더 지켜보다가 정말 달가워하지 않는다는게 확인되면 나름의 선택을 할 생각이다.

그 선택지 중에는 아수나로를 아예 떠나는 것도 있겠지만, 나는 가능하면 그 최악의 선택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활동했던 3년여의 시간 동안 아수나로 (부산지부)로부터 받은 것이 많고, 지금 내 삶에서 아수나로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꽤나 크다. 어쩌면 내가 지금 ‘주는 것 > 받는 것’이라고 느끼는 건 여태껏 ‘주는 것 < 받는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산지부가 망한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사실 내가 가늘고 길게 활동하려 하는 것을 서울지부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가늘고 길게 활동하는 것, 즉 아수나로가 나에게 ‘덜 요구하는 것’을 지금 당장 실현시키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이 아니라 제 3의 방법 밖에 답이 없기 때문이다. 3) (나를 제외한) 다른 활동가들이 아무런 추가적인 ‘받는 것’ 없이 더 많이 일하게 하기.

셋 다 ‘비인간적’이긴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2번(지금의 헌신적인 활동가들에게 생계를 보장하고, 그 대신 더 많이 일하게 하기)이 가장 나은 것 같고, 2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내 입장에서도 ‘활기’가 활동가들에 대한 경제적 기반을 만드는데 별 의욕이 없는건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 선택의 시간이 오기엔 좀 이른 것 같기 때문에. 사실 선택이라 해봐야 별 것 없겠지만.


시험기간이라며 바쁘다고 활동에 지장을 주고 있으면서 시험공부는 안하고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아 있다. -_-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교육생각>에 게재된 글입니다.

지방선거 단상

지방선거가 끝났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개표 방송을 보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았고, 하루 종일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1991년 5월에 태어나 만 19세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방선거날 아침 일찍 가야할 곳이 있어서,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을 때 투표를 하러 갔다. 노인들이 많았고, 나 빼고 가장 젊어보이는 사람이 40대 정도였다. 이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대개 누구에게 투표하러 왔는지 짐작이 갔기에, 나는 징글징글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 투표하느냐를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번 선거에서 서초구 주민으로서 투표했다. 기숙사로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인데, 순전히 ‘곽노현 교육감’과 ‘노회찬 시장’을 뽑기 위해서였다. 곽노현 씨가 진보교육감 후보로 단일화된 다음날 바로 전입신고를 했다. 경선에 나온 진보교육감 중 가장 인권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그로 단일화된 것은 나에게 꽤나 기쁜 일이었다.

전입신고할 때는 기쁜 마음이었지만, 막상 선거가 다가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투표용지 8장 중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이름답게 서초구에는 ‘진보’ 교육의원 후보가 나오지 않았고, 구청장과 시의원, 구의원, 기초비례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나오더라도 찍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 투표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무효표를 만들지는 않아도 되는데.

이번 선거에서 나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게 표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노회찬 후보가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아서 한명숙 후보가 졌다며 노회찬 후보에게 심한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라 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무효표가 유효한 정치적 의견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내가 했던 고민(그것이 유치한 것일지라도)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리려면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글로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선거 전 몇몇 사람들에게 내 결정을 이야기하며 약간은 섬뜩한 농담을 곁들이곤 했다. “만약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이긴 후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전부 숙청해버릴 거라면, 나는 무효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어.” 내가 보기에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보이는 행태는 이러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선거가 이번이 끝인양,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종신직이라도 보장받는양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무지한 탓인지, 나는 민주당과 국참당이 어떻게 지방정치를 바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공약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분명 약간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을 뽑으면 좀 더 살기 좋아지겠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없었다. <딴지일보>는 ‘서초민주당’을 무척이나 칭찬하던데, 나는 이들의 공약을 읽어봐도 딱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내가 서초구 주민이라기 보다는 서초구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떠날 외부인이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살던 고향에 나온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 ((그 후보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해운대에는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가 총 3명 나왔는데, 3명 모두 당선되었다.))의 공약과 이들의 공약을 비교하며 내가 서초구로 주소를 바꾼 것을 아쉬워했다.

하여튼, 나는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었고, 그 선택을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쩌면 한나라당이 당선되는데 보탬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서초구 구청장과 시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구의원만 민주당 후보 한 명이 당선되었다.)), 나는 이 선택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낫다고 판단했기에 이렇게 하였다.

좋게 생각해서 지방선거가 지방정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선거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012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이번처럼 민주당이 승리한다고 하자. 과연 그 승리가 천년만년 계속될까. 대안 없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심판을 위해’ 찍어달라고 해서 얻은 표는 쉽게 가버리기 마련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인 선거 때조차 ‘정권 심판’ 외에는 민주당을 왜 찍어야 하는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들이 또 다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빼앗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되면서 한국 정치는 점점 더 보수화될 것이고,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무효표를 만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쁜 것은, 곽노현 후보가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인천과 부산에서 진보교육감 후보가 2위로 떨어진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6명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다는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를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한편 든다. 내가 진보교육감 당선을 바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인데, 어쩌면 이들의 당선이 내 바람에 오히려 적(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이다.

학생들은 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학부모들은 학생인권조례에 딱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학부모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자신의 자녀가 자퇴하도록 허락해줬거나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이 말은, 교육감에게 학생인권조례가 후순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 세력은 별로 영향력이 없고, 반대하는 세력의 힘은 막강하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진보교육감’ 하나만 믿고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압박 없이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힘든데, 학생들은 “이젠 되겠지”라고 말하며 “언제 되나요?”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초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던 경기도에서 숱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가 있는데, 수원지부 게시판에는 매일같이 “학생인권조례가 언제 만들어지나요?” 따위의 글이 올라오는 실정이다.

학생들이 각 교육청에 그런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끼고 학생인권조례를 서둘러 추진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별로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진보교육감의 당선이 청소년들의 행동을 약화시키지는 결과만 낳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대다수 청소년들이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이 할 일이겠지만.)) 이게 노파심이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지방선거 후에 드는 잡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