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에 불행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3개월 정도가 지났고, 수능을 친 것은 이미 까마득하게 지난 일로 느껴지는 5월. 나는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학교 안에서 정말이지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내가, 다시 그 괴로운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학교의 그 모든 억압. 아침마다 머리를 내일까지 잘라오라며 누군가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기는 ‘학주’의 모습을 보는 것, 수업시간에 졸았다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겠다며 누군가의 손바닥을 때리는 교사의 모습을 보는 것, 2학년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야자시간 중 1학년 교실에 들어와 고함을 지르고 가방 속 물건을 샅샅이 뒤지며 ‘소지품 검사’를 하는 선도부원들의 모습을 보는 것, 따위의 억압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거나 그립다거나 뭐 그런 이유일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그 수많은 억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나는 억압에서 벗어난 대가로 일탈의 기쁨마저 빼앗겨 버렸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사회과학이라거나 인문학 따위의 ‘쓸데없는’ 책을 꺼내서 조용히 읽는 기쁨, 점심시간에 학교 안을 거닐며 따뜻한 햇볕을 쬐는 기쁨, 야자를 ‘째고’ 학교 밖으로 나와 느끼던 그 상쾌한 밤 공기의 기쁨, 그 모든 기쁨을 다시는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좀 더 일탈했어야 했다. 조금 더 야자를 많이 째고, 조금 더 햇볕을 많이 쬐고, 조금 더 많이 쓸데없는 책들을 읽었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게 지금은 너무나 후회스럽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이곳 대학에도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행복이 나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행복하기에 불행한 것 같다….

행복하기에 불행한”의 16개의 생각

  1. 일탈은 ‘억압’처럼 틈새 없는 시스템에서 잠시 빠져나올 때 잘 느낀다고 하죠. 다만 이것도 기준이 있어서 일탈이 장기화되면 또 하나의 억압 or 시스템이 됩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개인이 끊임없이 refresh(쇄신;;; 정도로 이해를.) 하거나 다른 면을 보도록 노력해야 할 겁니다.

    …라고 생각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정도는 다르니. 아직 전, 기분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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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헉… Skyjet 님의 말이 정말 맞아. 내가 딱 그래. 학교를 처음 딱 그만두었을 때 그 짜릿한 자유를 잊지 못하는건, 난 지금도 한없이 자유롭지만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건, skyjet 님의 말처럼 일탈이 장기화되면 또 하나의 억압,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때문인 것 같아. 와… 진짜 덧글 보고 좀 놀랐……. skyjet 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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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괜찮아, 내가 보지 못했던 혹은 잊어버렸거나 덮어두었던 나 자신들, 이 사회들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될테니까.

    자유는 일탈이라는 ‘소극적 자유’로부터 시작되지만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지. 고등학교라는 억압적 구조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소외’는 여전히 내 안에 가득하고, 그렇기에 언제든지 괴로움들을 마주하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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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위 글에 이어)네가 소외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지 못하는 이상 언제든지 아픔은 너의 곁에, 너의 안에 있는 거지.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그래서 힘겹고 끝이 없는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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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자기외화自己外化라고도 하죠.
    쉽게 설명하면 나 아닌 나 밖의 것이 나를 압도하고 거기 내면화된다랄까. 이를테면 ‘학벌 이데올로기’에 외화된다, 소외된다는 건 스스로가 그것이 되어간다는 것과 같다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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