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자유화에 관해

2006년에 쓴 두발자율화에 관해와 비교해 볼 때, 지금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청소년 인권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는 등 ‘인권’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지금의 생각을 정리해둘 겸 글을 쓴다. 생각이 달라진 것은 글의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발자율화에 관해 2’가 아닌 ‘두발자유화에 관해’.

‘자율화’와 ‘자유화’, 영어로는 둘 다 ‘liberalization’인데다가 한국어에서도 일반적으로 큰 차이를 두고 사용하지 않지만, 청소년 인권 운동에서는 이 둘을 서로 구분해 쓴다. ‘두발자율화’가 학생이 자신의 머리 형태 규율을 만드는데 참여할 수 있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두발자유화’는 그러한 규율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규율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두발자율화’는 보통 ‘두발규제 완화’라는 주장과 연결되곤 한다.))


몇 년이 넘도록 ‘두발자유화’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가지 의견이 있고 주장이 있지만, 문제는 하나다. 두발자유화 문제가 몇 년이 넘도록 해결이 안 되는 건, 두발규제가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며, 설사 인식이 있더라도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니 어느 정도의 인권침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두발규제는 크게 다음과 같은 권리를 침해한다: 학생의 행복추구권 ((일본과 대만이 이를 근거로 두발규제는 인권 침해라고 인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도 두발규제가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어 나온 권리인 ‘개성발현권’을 침해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신체자유권 ((한국에서는 ‘국가 권력이 자의적으로 개인을 구속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개인의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 진보적 해석 또한 있다. 진보적 해석에 따르면 두발규제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어떠한 규칙이 인권에 반한다면 그 규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규칙’을 규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두발규제가 인권을 침해하긴 하지만 학생들은 미성숙하므로 규칙을 지키는 훈련을 먼저 받아야 한다며 두발규제를 옹호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과연 미성숙한가? 학생들은 본디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하도록 만들어진다. 규율을 만드는 경험은 갖지도 못한 채 이미 주어진 강압적인 규율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제함으로써, 학생들이 주어진 규율 없이는 행동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태도나 규율에 무조건 반항하는 문제적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 규칙을 지키는 태도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권을 침해하는 억압적인 규율 또한 지켜야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두발자율화’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두발규제를 완화하고, 학생이 두발규제를 정하는데 참여한다면 그 규제가 친親인권적인 것이 될까? 깡패가 50대를 때리든 10대를 때리든 폭력은 폭력이고, 맞는 사람이 몇 대를 맞을까 결정할 수 있어도 폭력은 폭력이다. 인권은 다수의 합의로 포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때는 헌법에 나아 있듯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뿐이다. 기본권 제한의 한계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기본권 ‘제한’과 ‘침해’ 사이 참고.))

두발규제에 대한 답은 하나이다. 두발규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 너무 독선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두발규제를 옹호하는 말을 하기 이전에, 두발규제를 하고자 하는 이유가 단순히 학생을 통제하기 쉬운 ‘로봇’으로 만드는데 있지 않은지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덧붙임.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논리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원한다면, 두발자유를 주장하려는 청소년을 위한 논리들 참고.

근본적으로는 보수주의자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로쟈

로쟈 님이 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하여를 읽었다. 얼마 전에 지곡에게 이야기하던 것이 겹쳐서 굉장히 흥미롭게 들린다.

“얼마 전에 나는 아는 분과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진보적인 성향인 그분이 서비스 종업원에게 취한 태도에 나는 조금은 실망했었다. 서비스를 구입했다고 해서 종업원의 웃음이나 상냥한 태도까지 구입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서비스를 구입하므로써 그런 것까지 같이 구입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인데.” 이 말을 지곡에게 하면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너무 민감한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 또한 이런 점에서 별로 민감하지 못하다.”라고 덧붙였다. 나 자신이 민감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로쟈 님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적당히 인간적인 서비스’를 원할 뿐, ‘서비스 없음’을 원하지 않는다.

로쟈 님의 말대로 나 또한 이것을 ‘모순형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딱 이 정도만을 바란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기는 쉽지가 않다. 아니, 꼭 상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환상에 언제까지나 취해있고 싶은 것이다. 적당한 변화, 적당한 개혁, 적당한 진보.

일전에도 몇 번 내가 좌파가 아닌 이유에 대해 설명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글도 그 글들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좌파라고 고문당하는 일도 사라진 요즘에, 내가 굳이 좌파가 아닌 이유를 집요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명박 독재’라지만 동시에 ‘좌파’라는 단어가 뭔가 패션 소품처럼 느껴지는 시대이고, 그런 점에서 내가 남들에게 좌파라고 여겨지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착각을 피하기 위해 내가 좌파가 아니라는 말을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적당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정도가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는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덧붙임.
아, 새해 아침부터 왜 이리 폼잡고 80년대 풍의 글을 쓰고 있는거야, 나도 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