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지정문답, 교육

Skyjet님이 보낸 릴레이 지정문답. 주제가 ‘교육’이라니,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일단 답을 써본다.

1. 최근 생각하는 ‘교육’

한자 敎育이나, 영어 education의 어원인 라틴어 educatio 둘 다 미숙한 상태를 성숙하게 ‘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교육의 이러한 의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교육을 받는 사람이, 교육을 하는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교육일까?
나는 서로를 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구분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셰르파와 등산가의 관계에 비유하고 싶다. 셰르파는 산에 오른 경험이 등산가보다 더 많지만, 그렇다 해서 등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산에 오를 때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올라가는 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셰르파들이 받는 처우를 생각해볼 때, 이 비유는 적절치 않은지도 모르겠다. 셰르파의 지위는 지금보다 높아져야 하고, 교사의 지위는 지금보다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이런 ‘교육’ 감동!

이계삼 선생님이 쓴 칼럼을 읽고 감동을 한 적이 있다. 일본 드라마 <양키-모교로 돌아오다> (ヤンキ-母校に帰る)를 보면서도 감동을 했었고. (물론 100%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지만.)

3. 직감적으로 ‘교육’

dialogue.

4. 좋아하는 ‘교육’

세상을 보는 눈을 변화시키는 교육.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교육.

5. 이런 ‘교육’ 싫어

이런 건 교육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입시’ 교육. 국가경쟁력 따위를 들먹이며 ‘인간’을 보지 않고 ‘국가’를 보는 교육.

6. 다음에 넘겨줄 7명

  • 공현 – ‘욕망’
  • 릴로 – ‘책’
  • 아크몬드 – ‘윈도우즈’
  • 정현 – ‘디자인’
  • 쩡열 – ‘음악’
  • 플라스틱 – ‘영화’
  • 해밀 – ‘철학자’

교원평가제에 대한 오해, 나의 생각

나무 책상과 의자, 칠판이 있는 빈 교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지난 12일 ‘교원평가제’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혀 교원평가제를 법제화시키고자 하는 흐름이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민들이 교원평가제를 도입할 것을 원하고 있는데, 교총이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이후 비난의 화살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집중되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있노라면, 많은 이들이 교원평가제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법제화하려는 교원평가제는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오해가 있는지 하나씩 알아보자.

먼저, 모든 이들이 평가를 받는 세상에서 교사만 평가에서 예외가 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 있던데, 교원평가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평가는 있었다. ‘교원근무평정’이라는 제도가 그것인데, 학교장 등 학교의 관리자가 교사의 (수업 능력이 아닌) ‘사무행정업무 능력’을 평가한다. 그런데 이는 승진과 연계됨에도 교사에게 공개되지 않으며, 학교장의 마음대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받아왔다. 전교조는 ‘교원근무평정’의 문제점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교원평가제가 교원근무평정과 연계되어 학교장과 교육청이 ‘승진’을 빌미로 교사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기 전에 교원근무평정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무평정이 없어져야 한다는 건 전교조가 핑계로 내세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더 있다. 지금 법제화를 추진하는 교원평가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가 없는 형태이다. 한나라당 법안의 경우, 교원능력개발평가(동료평가)와 학생·학부모 평가를 구분하여 동료평가를 주(主)로 하고 있다. 학생·학부모 평가의 경우, ‘만족도 조사’로 이루어지며 참고만 할 뿐 전체 평가에 끼치는 영향은 적다. 이것이 당신이 바라는 형태는 아니지 않은가? 참고로 동료평가는 ‘수업참관’으로 이루어지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실효성이 무척 떨어지고 교사 간 다툼만 생길 가능성이 크다. 수업참관을 해봐야 그 내용은 무척 형식적일 것이 뻔하지 않나.

전교조가 대안은 없이 반대만 외친다는 주장들도 많던데, 이미 오래전에 대안을 내놓긴 했다. ‘학교교육종합평가’가 그것인데, 교사의 수업 외에도 학교의 교육계획 전반에 대해 평가하며, 교사는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여 (동료평가가 아닌) ‘자기평가’를 하는 방식이다. 사실 교육의 문제는 교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학교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수업연구보다 사무업무를 잘해야 승진할 수 있다거나(근무평정),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운영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거나…. 진정으로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 아닐까?

그런데 전교조가 제시한 대안도 문제는 있다. 학생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교사의 자기평가에서 학생의 의견은 단지 참고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교사가 자기평가를 할 때 학생의 의견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교원평가제에 대한 지금의 논의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해로 점철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논의의 기반에 깔린 가치관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현재 공교육의 문제는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교사를 학원강사처럼 만들고 싶어 교원평가제를 시행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착각을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든 이들이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가? 혹은, 모든 이들이 현재 성적으로 가능한 대학보다 더 높은 순위의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한가? 대학입시는 제로섬 게임이다. 교사가 아무리 뛴다 한들, 입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원강사를 이길 수는 없다. 입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틀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틀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나의 생각은 「청소년의 눈으로 입시경쟁 바라보기」 참조.))

또,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도저히 교직에 있어서는 안 될 인성을 지닌 교사라던지,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는 교원평가제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1년에 한 번 하는 교원평가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장 징계를 내려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교사를 학원강사로 만들고 싶다거나, 인성파탄의 교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이유 외에도 교사의 교육에 관해 학생들이 참여하고 싶은 이유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전교조의 대안은 학생들의 참여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 같으니, 역시 교원평가제를 해야 할까? 한나라당의 교원평가제 안은 문제가 있으니까, 학생·학부모의 평가가 좀 더 중요시되는 교원평가제를 하면 될까?

그러나 과연 ‘매우 만족~매우 불만족’의 5지 선다형 평가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참고로 전교조의 ‘학교교육종합평가’는 서술식 평가.)) 이분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교평의회 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사의 수업방식에 의견이 있는 학생과 학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교장·교사와 토론을 하는 것이다. 토론을 한다면 교장과 교사도 학생·학부모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학생과 학부모도 교장·교사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한 객관식 평가로 무엇을 개선할 수 있겠다는 건지 의문스럽다. 시행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일이긴 하지만, 나는 학교평의회 제도가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왕석현에게 선거권을! 아니, 그 이상을!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일명 썩은 미소를 짓는 왕석현

왕석현은 <과속스캔들>에 출연한 한국의 배우이다. 영화 <과속스캔들>의 흥행에는 왕석현의 ‘똘똘한 연기’와 ‘애늙은이 같은 대사’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왕석현에게는 현재 선거권이 없다. 왕석현은 2003년 6월 2일생으로 2009년 8월 현재 만 6세인데, 한국에서 만 6세는 선거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만 6세의 어린이에게 선거권을 주는 경우는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물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왕석현에게 선거권을 주면 왜 안 되는가? 그의 연기를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선거권을 행사할 것 같지 않은가? “연기는 연기일 뿐, 실제로는 ‘애’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애’에게는 왜 선거권을 주면 안 되는가? 합리적인 판단을 못 하므로?

여성은 이성적으로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좀 더 우월한 이성을 가진 남성, 특히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교화되어야 하는 존재다.

Jean-Jacques Rousseau

비단 루소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 사상가들이 ‘여성의 이성은 남성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1900년대 중반까지 여성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과거 남성 사상가들의 이 같은 생각이, 어린이가 아닌 사람들이 지금 하는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과거의 잘못된 판단이고, 아이들은 ‘확실하게’ 이성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으냐고? 무슨 근거로? 아이들에게 선거권을 준다면, 아이들이 “닌텐도DS를 무료로 배포하겠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공약을 듣고 표를 줄 수도 있다고?

매년 7%의 경제 성장률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이명박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와 같은 공약을 내세워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은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참고로, 닌텐도를 만 5세~만 12세 어린이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데 드는 돈은 이명박의 ‘4대 강 정비 사업’에 들어가는 22조 원의 ’3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747 공약’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미개하지 않은가? 만약 이들이 이성적으로 미개하다면, 이들의 선거권을 박탈해도 되는가?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만 19세 미만의 한국 국민에게는 선거권이 없고, 만 19세 이상에게는 선거권이 있는 것인가? 미성년자들은 현재 비-미성년자들에게 여러 면에서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던 과거,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과거에 완전히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거권을 만 19세 제한으로 할지, 만 18세 제한으로 할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거권이 만 18세 이상이 될 때 주어진다면, 만 17세까지는 ‘이성적으로 미개’하던 사람들이 만 18세가 되는 날 밤 갑자기 머리에 빛이 나며 ‘계몽’되는가? (웃음) 선거권에 나이 제한을 둘 경우 이런 시비는 늘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나이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왕석현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선거권이 제한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자. 왜 선거권인가? 왜 선거권에 이렇게 집착해야 하는가?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선거권에 과도하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공현, 「청소년은 정치적 동물이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다시 말하면, 선거 외에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특히 심하다. 현재 미성년자는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청소년 중 상당수가 집회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청소년의 25%가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독일 ((김선경, 「“유럽 청소년의 정치참여는 너무도 당연”」, 1318바이러스 2005년 11월 30일자.)) ,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 청소년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온 프랑스 ((김행수, 「파업하는 프랑스 청소년, 감시당하는 한국 청소년」,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20일자.)) 등 서구 국가들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의 이 같은 행태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민주주의 의식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키워진다. 어릴 때부터 정치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 원리를 몸으로 익힌 사람들이라면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살펴보지도 않은 채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따위의 허황한 말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거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정치적 권리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주어져야 한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왕석현에게 선거권을! 아니, 그 이상을!

하양이, 하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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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초록색 눈을 뜨고 정면을 귀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고양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음흉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

마루바닥에 앉아 고개를 돌려 정면을 쳐다보는 하얀 고양이

하인이가 우리 집에 온 지도 한 달 반쯤 되었다. 처음에는 하양이가 하인이를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요새는 하인이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하양이를 괴롭힌다. 위에서 뛰어내려 덮친다거나, 귀를 문다거나 등등….

사진으로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하인이가 살이 좀 쪘다. 하양이가 이 맘 때쯤이었을 때 몸무게 나가던 것보다 더 나가서 큰일이다. (하양이는 몸집이 큰 종이라….) 식욕이 끝이 없는지, 엄청나게 빨리 자기 사료를 먹어치우고는 하양이 사료까지 빼앗아 먹으려 한다. 팔다리는 가는데 배만 볼록한, ‘스파이더캣’이 되어가고 있다. (웃음)

하양이는 가출한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하인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만큼 애교를 부리는 일이 적어졌고 많은 일에 심드렁해졌다. 고양이다워지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가끔가다 애교를 부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하인이는 심술이 나는지 하양이를 발로 한 대 치곤 한다. 그러면 하양이는 애교를 그만두고 그냥 가 버린다.

하인이도 처음과는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람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데, 요새는 혼자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늘 침대 밑에 앉아 있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하양이와는 달리, 하인이는 거실에서만 지낸다. 어제부터 하인이는 꽃을 꺾어서 노는 것에 푹 빠져 있다. 하인이를 볼 때마다 몇 달 전의 하양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더. ‘요염한 하인이’. 합성 아니다. (웃음)

한 발로 얼굴을 괸 채 몸을 쭉 뻗은 자세로 배를 드러낸채 누워있는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