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êve: La Nuit à Paris

빠리의 밤. 클리시 광장. 그와 나는 빨간 지붕의 까페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옷이 조금씩 젖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내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붉은 얼굴로 나는 저기 붉은 까페에 잠시 들어가 비가 그칠 때까지 뭐라도 좀 마시자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북쪽 언덕에서 우산을 파는 한 남자를 보았다고, 그 우산을 사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붉은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는 우산을 사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펴지지 않는 우산을 세차게 흔들었다.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나는 붉은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애원하듯 까페에 들어가자고 말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우산을 사러 북쪽 언덕으로 가버렸다. 나는 불안해졌다. 나는 다시 우산을 세차게 흔들었다. 비를 맞으며 계속 흔들리던 우산이, 펴졌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걸어와 우산을 같이 쓸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은 우산이 없다면서. 나는 긴 생머리를 한 그 사람에게, 꺼지라고 소리쳤다. 눈물이 났다.

나는 우산을 사러 간 그를 찾으러 북쪽 언덕으로 달려갔다. 비는 그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비가 계속 오기를 원했다. 간절히 원했다. 간, 절, 히, 원, 했, 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그가 우산 파는 남자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펴져 있던 우산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 우산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우산을 잃어버렸다. 비는 그쳤다. 그는 우산을 사버렸다. 나의 우산이 아닌 우산.

이것은 꿈이다. 거짓말 같이 생생한 꿈. Henry Valentine Miller.

정말로 끝: 인권의 보편성 논쟁

논쟁을 계속하려 했더니, 논쟁상대자가 덧글을 달아주질 않네요. 그가 제 블로그 주소를 알아내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그에게 논쟁을 계속하자고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논쟁을 이쯤에서 마치게 될 것 같네요. 논쟁을 간단하게 정리해두려 합니다. 제가 별로 논리적이지 못한데다가 공부도 부족해 글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많을 것 같은데, 지적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이론체계에는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공리’라고 하죠. 공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합니다. 인권의 공리는 아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 되겠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권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합니다.

논쟁상대자 (닉네임) Yahweh는 이 점을 공격하죠. 인간이 존엄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권이론은 모조리 틀려먹었으며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이유를 듭니다. 첫째로는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 둘째로는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사실 둘 다 황당한 지적입니다. 첫 번째 지적에 관해서는 마지막 답변에서 답을 한 바 있죠.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이지만, 단백질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배치’마저 같지는 않다는 것. 그 특별한 ‘배치’가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러므로 ‘존엄하지 않은 단백질 덩어리’와 ‘존엄한 인간’은 구분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인권’뿐만 아니라 ‘동물권’, ‘식물권’, ‘존재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발전시키기가 아직까진 쉽지 않네요.

두 번째 지적의 경우, 이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한 바 있죠. 애초에 증명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을, 증명불가능하니까 안 된다고 주장을 하니…. 이런 식으로 들이대면 무너지지 않을 이론체계는 없습니다. ‘자본주의’를 예로 들어보죠. 자본주의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이기적 개인’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증명합니까? 게다가, 인간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동물이라는 것도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는걸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이론 상으로 무너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민족주의’ 또한 마찬가지이겠죠. Yahweh는 덧글 상에서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되돌려주는 것 뿐이죠. 이론체계에 증명불가능한 공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권은 무너뜨릴 수 있을지언정 다른 어떠한 이론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도대체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를 해체해 냈다고 득의양양 깝쳐대는 속칭 ‘좌파 지식인’들”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한심한 주장을 하는 지식인은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그 ‘지식인 리스트’에 누가 있는지 저에게 알려준다고 해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저는 그 지식인들의 대변인이 아니고, 좌파도 아닌걸요.

덧붙임.
1.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것(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 앞뒤 생각않고 ‘인권문제’에 달려들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참을 수 없는 어떤 ‘인권의 보편성’의 가벼움은 북한인권단체들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죠. 자본주의를 다시 예로 들자면, 인간이 이기적 존재임을 공리로 삼는다고 해서, 어떠한 사회의 여러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를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론은 보편적이지만, 그 이론의 적용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2. 사실 이 논쟁은 몇 달 전에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새로운 고민에서 니체의 말을 바꿔 “무엇이 보편적인가?”가 아닌, “왜 보편성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미 (오프라인 상에서 Yahweh에게) 제가 적절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인권은 보편적인가?”를 여전히 계속 고민하고 있었기는 합니다. 인권, 보편성과 끝없는 투쟁에서 이야기한 바처럼, 인권의 보편성(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를 논증할 수 없다면 구체적 권리들을 말하는 것은 결국 ‘생떼’와 구분할 수 없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공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생떼’가 되어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3. 사실 이런 짓 무의미합니다. =_= 이럴 시간에 인권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고민하는게 백 번 낫죠. 이런 논쟁이 인권이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이보다 훨씬 생산적인 논쟁이 역사상 많이 있었죠. (궁금하시다면 ‘인권의 문법’이라는 책을 보시길.)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이유로 논쟁에 매달려 여러 바쁜 사람들을 소환(?)한 저를 용서해주시길.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