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꿈

꿈 속에서 나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먹지 않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그가 에스까르고(Escargot)를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흘깃 보더니, 내 접시에 자신이 먹던 에스까르고를 덜어 주었다. 나는 정말 기뻤다. 꿈 속에서 나는 그와 함께 에스까르고를 먹었다.

갈증

꿈 속에서 나는 이야기를 하며 계속 걸었다. 목이 말랐다. 어떤 이상한 가게. 물건을 파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가게 주인. 물을 달라고 했더니 흐물흐물한 초록색 젤리를 주었다. 외계에서 온 듯한. 난 목이 말랐다. 목이 말랐다. 목이 마르다구. 난 지구의 물을 원했다.

꿈에서 깬 뒤, 나는 결국 울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고 나니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고 나니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나는….

답답해서 쓰는, 누구 보라고 쓰는 글

누구 보라고 쓰는 글. 모든 논쟁은 ‘현재, 이 세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당신과 논쟁을 하다보면 18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하다. 자본가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시장 논리’만 있던 그 때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당신을 보면 답답하다. 자본가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보장을 당연시 여기면서, 전체 인민의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철학적 논거가 부족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답답하고.

인권을 왜 보장해야 하는가 논증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 논증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그런 용감한(?) 주장을 하기 이전에, 인권 관련 국제협약을 한번쯤은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가장 유명한 국제협약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인권규약 중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구속력 있게 만들기 위해 1966년 UN이 채택한 국제협약으로, 법적구속력을 갖고 있으므로 가입국은 이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입하지 않으면 이 규약에 명시된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최대한 보수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국제인권규약은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A규약)’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 및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선택의정서(B규약 선택의정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참고로 한국은 A규약과 B규약 모두 가입하였고, 중국도 두 개 규약 모두 가입하였으나 B규약은 아직 비준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 비준할 가능성이 높다는 2006년 기사가 있던데, 비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덧글 부탁드린다.)

제7조

이 규약의 당사국은 특히 다음사항이 확보되는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을 모든 사람이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

가. 모든 근로자에게 최소한 다음의 것을 제공하는 보수
(1) 공정한 임금과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는 동등한 가치의 노동에 대한 동등한 보수, 특히 여성에게 대하여는 동등한 노동에 대한 동등한 보수와 함께 남성이 향유하는 것보다 열등하지 아니한 근로조건의 보장
(2) 이 규약의 규정에 따른 근로자 자신과 그 가족의 품위 있는 생활

나. 안전하고 건강한 근로조건

다. 연공서열 및 능력이외의 다른 고려에 의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장에서 적절한 상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

라. 휴식, 여가 및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 공휴일에 대한 보수와 정기적인 유급휴일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A규약) 중. 다국적 기업들의 중국에서의 노동 착취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 될 수 없다.

제19조

1. 모든 사람은 간섭받지 아니하고 의견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3. 이 조 제2항에 규정된 권리의 행사에는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그러한 권리의 행사는 일정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그 제한은 법률에 의하여 규정되고 또한 다음 사항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가. 타인의 권리 또는 신용의 존중

나. 국가안보 또는 공공질서 또는 공중보건 또는 도덕의 보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 중.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빨갱이”든 “(환경에 미칠 영향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떼쓰는 년”이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당신이 지율 스님에 대해 ‘년’자 소리까지 붙여가며 흥분한 ‘천성산 도롱뇽 소송’의 경우, 개발로 인해 영향을 받는 이해당사자들의 ‘환경정책 결정 참여권’과 관련된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환경정책 결정 참여권’은 현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권이긴 하지만 아직 국제협약에 포함되지 않은데다, 도롱뇽을 이해당사자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있었으므로 좀 더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이 부분은 그 때 말했듯 나에게는 분명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당신은 (정부에게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고 개발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지율 스님의 발언과 행동 그 자체에 대한 비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비용이 얼마가 들게 만들었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낭비한’ 돈을 얼마나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지와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돈이 낭비되었다고 해서 그런 발언과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면, ‘국회를 해산하고 전제군주정으로 돌아감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를 하느라 낭비된 돈을 다른 일에 쓰자’는 주장 또한 가능한 것이 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이다.

끝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국제규범적 차원에서의 접근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평화주의 그 자체에 대한 논쟁은, 나 말고 평화운동가들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떻게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는, 나는 분명 부족한 점이 많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만들지는 않는다.

할 말 있으면, 부디 덧글로 해주길 바란다.

덧쓰기.
그러고보니, 이렇게 누군가 한 사람만을 위해 글을 쓰는 경우는 처음인듯. DNFTT라던데, 이런 식으로 자꾸 행동하면 안 되려나. (웃음)

사랑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의 대화 속에 잠깐씩 섞여 나오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두 분은 어떤 사랑을 하셨을지 듣고 싶어진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할머니께 여쭤보고 싶지만, 할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꺼리신다시기에, 망설이고 있는 중. 하지만,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만 들어도, 두 분의 이야기는 정말 특별할 것 같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두 살 많았다. 두 분을 만나게 한 것은 한국 전쟁. 그 당시 두 분은 중학생이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을까.) 서울에 살던 할머니는 대구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전쟁 동안 어느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할아버지의 친척집. 할아버지는 그 당시 대구로 유학을 와서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두 분은 그렇게 만났다.

할머니가 서울로 돌아간 이후에도 두 분은 편지를 계속 주고 받았던 것 같다. 두 살 차이라지만, 할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 이후 바로 대학에 진학하셨기에 실상 네 살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진로에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조언에 따라 학비가 들지 않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셨다.

할아버지가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1년쯤 뒤, 두 분은 결혼하셨다. 할머니의 집안에서 반대가 많았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두 살 많기도 했고. 할머니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데 반해, 할아버지는 (장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긴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건어물상의 아들이었으니까.

두 분은 결혼 후 다섯 달 뒤, 아버지를 낳으셨다. 할머니께서 이 이야기를 하기 꺼리시는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일이니, 40여년 전이었으면 오죽했을까. 두 분은 그 후 37년을 함께 하셨다. 할아버지의 제사 때마다, 방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두 분은, 어떤 사랑을 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