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200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 동료들과 중남미 소설을 읽었다. 어떤 호기심이나 필요를 느껴서가 아니라, 연구실에 있는 독특한 세미나 제도 때문에 ‘읽어야 했다.’ 연구실의 모든 회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열리는 어떤 세미나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케포이필리아’라고 불리는 이 세미나는 회원들에게 자기 전공을 떠나 다른 분야로의 횡단을 강제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2005년 하반기 이 세미나의 주제가 중남미 소설이었다.

강제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시작 때뿐이었다. 막상 소설들을 읽기 시작하자 각 작품이 지닌 마력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위주로 읽었는데도, 워낙에 읽어둔 게 없던 탓에 내게는 작품들 모두가 새롭고 강렬했다. 이 소설들 중 특히 내 눈을 끈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멕시코 작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Elena Poniatowska)의 「시네 프라도」가 그것이다. 나는 이 작품이 ‘여성’과 ‘진리’에 대한 남성과 철학자들의 편견을 재치 있게 고발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 분량이 열 쪽밖에 되지 않는, 정말로 ‘짧은’ 단편이다.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린 어떤 남자가 자기가 좋아했던 여배우에게 보낸 편지, 그것이 전부다. 남자는 그녀의 영화 속 이미지에 병적으로 빠져든 사람이다. 그는 항상 그녀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여러 번, 여러 개봉관에서 본다. 그러던 어는 날, 그는 새로운 작품에서 그녀의 이미지가 자신을 완전히 배반했다고 느낀다. 감독의 지시나 시나리오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의 그녀’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절망하고 분개했다. “당신의 가면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속임수가 비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가 하나의 가면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가면 속의 ‘진짜 그녀’는 ‘인간 쓰레기였다’고 흥분한다. 자신이 그 동안 그녀의 연기에 속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그저 그런, 기분 나쁜 ‘팬레터’와 확연히 구분시켜주는 것은 편지 끝에 덧붙여진 ‘추신’이다. 이 추신이야 말로 이 소설의 백미다. 추신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는 어느 날 극장에 가서 영화가 절정에 이를 무렵, 칼을 빼들고 스크린으로 달려가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이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는 그녀의 이미지를 사랑했고, 그 이미지에 배반당했으며, 그 이미지를 살해한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는 제멋대로 여자의 이미지를 그렸고, 여자는 그 이미지를 흉내내어 자신을 만들었다.” 이 독특한 상호작용 속에 어쩌면 서양철학의 근본 문제와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니체는 남자가 여자에 안달하면서도 여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진리에 안달하는 철학자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혹여 여자를 안다고 말하는 남자,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해도, 그가 가진 것으 여자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이미지, 진리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다.

니체는 또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모든 철학자들이 독단론자들인 한 그들은 여자에 대해 지극히 미숙한 게 아닐까. 이제까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때 흔히 쓰던 방식, 즉 대단히 엄숙한 태도로 서투르게 강요하는 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부적당하지 않은가? 그녀가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미숙함. 그녀의 진정성에 대한 그의 독단적인 상상.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을 대하는 철학자의 미숙함도 마찬가지다. 현상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한 상상.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현상의 다양한 생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가면이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옷을 벗기면 그녀의 참된 속살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 한에서 남성은, 철학자는 어리석다.

지혜로운 여성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심오한 본질? 가려진 진정성? 그런 것은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한 남성과 철학자의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표면은 아무것도 가리고 있지 않다. 남성들이 확신하는 ‘진정한 여성’이란 겨우 한 껍질을 벗은 양파에 불과하다. 껍질을 벗긴 후 드러난 것도 껍질이다. 표면이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본질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표면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심오했기 때문에 표면적이었다.”

어쩌면 서양철학은 시네 프라도 극장의 남자가 보여준 정신 나간 짓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 철학자는 프라도 극장의 남자와 다르지 않다.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 그 영상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철학자는 바깥 세계에 그것의 원본이 있다고 말했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자 그는 칼로 자기 눈을 찔러버렸다. 프라도 극장의 남자와 차이가 있다면, 단지 어디를 찔렀느냐뿐이다. 스크린을 찌르거나 자기 눈을 찌르거나. 그들은 모두 표면의 놀이를 즐기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얼굴에 화장하는 법도 모를 것이다.

물론 연기하는 여자 쪽에도 위험은 있다. 니체는 여자들의 타락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남자가 그린 이미지를 연기하던 일부 여자는 그 이미지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평생 그 이미지에 갇혀 산다. 또 다른 일부는 연기를 거부하고 ‘진정한 여성’에 대한 독단적 상상에 빠져든다. 남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하나의 놀이로써 가면쓰기를 하고 있는 여성에 희망을 걸었고,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 했다. 그들은 표면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생성과 변신을 이용해서, 남자들과 철학자들을 유혹하고 파멸시킨다. “완벽한 여자가 사랑을 하면 갈갈이 찢어버린다. ……아,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살글살금 기어다니는 지하세계의 작은 맹수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어찌나 호감을 주는지!”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자들은 이런 여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자들은 이런 여성이 될 수 있을까. 은폐하고 거짓말하고 화장하고 변신하는 일이,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의 최고 미덕이 될 수 있을까.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중 ‘여성’.

그는 심각해진 나에게 ‘그냥 놀이’일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진짜’ 그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가 보여준 모든 이미지가 ‘진짜’ 그였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몇 달 전에 했던 그 말을, 이 꼭지를 읽으면서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에게 배운 것들이 정말 많다. 지금까지도.

여성”의 2개의 생각

  1. 수능이후 이계삼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고병권선생님 강의도 들어보고 술잔도 받아보고 그랬더랬지요.
    저는 아는게 없어서 그분의 강의, 말씀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정말 내년엔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네요… 제 무지가 답답하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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