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기호

소쉬르는 언어를 차이(differences)의 체제로 본다. 차이는 언어뿐만 아니라 다른 기호 체제에서도 의미의 기본적인 근거가 된다. 기호들의 기본적 의미 단위는 기호들이 서로 닮았느냐 서로 다르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적어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기호 사이에서 기호의 기본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결정됨을 암시한다. 하나의 독립된 기호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다. 차이는 낱 기호의 의미의 기본이다.

가령 신호등의 빨간색을 보자. 운전 중에 이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즉시 차에 제동을 건다. <멈춤>의 기의가 빨간색이라는 기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빨간색이 멈춤의 뜻인가? 빨간색이 <멈춤>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빨간색 자체가 그런 의미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파란색과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인위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실제로 빨간색은 <멈춤>만을 의미하는 색이 아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자연 현상으로 볼 때, 빨간색은 실상 <전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스페인의 투사가 빨간 망토를 펴면 투우는 거품을 물고 빨간 기호를 향해 돌진한다. 상어는 빨간색의 냄새까지 맡고 달려가 피를 흘리고 있는 먹이를 물고 뜯는다. 벌들도 두려움 없이 빨간 꽃으로 날아들어 꿀을 빨아간다. 인간의 교통 신호 체제에서 볼 때 동물들에게 빨간색은 인간의 청신호와 같다.

무엇이 같은 색깔을 정지의 신호, 혹은 전진의 신호로 만드는 것일까? 기호들은 모두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 사이에 이루어진 의미체들이다. 기호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생기고 그것은 약속에 의해 굳어진다. 그래서 어떤 계기에 의해 약속이 파기되면 그것은 의미를 상실한다. 약속이 변경되면 의미도 변한다. 약속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하여 관습화됨으로써 한 문화 속에 오래 남아 사람들의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을 은연중에 조정해 나가게 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한 기표가 다른 어떤 것을 표상함으로써 기호가 될 수 있다는 기호의 존재 양식은 참 흥미롭다. 이러한 기호의 표상성을 잘 나타낸 것이 퍼스의 다음과 같은 모형이다.

삼각형이 그려져 있고, 삼각형의 꼭대기 모서리에 '기호(♥)', 왼쪽 모서리에 '개념', 오른쪽 모서리에 '지시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삼각형의 꼭대기에 있는 ‘♥’는 기표로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표상한다. 그림의 왼쪽에 있는 것은 기표에 의해서 인간의 머릿속에 나타나는 개념이다. 그런데 기호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지시 대상을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머릿속에 형성된 ‘사랑’이라는 개념을 환기한다. 그래서 지시대상은 기호 주변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좀 더 나아가면 기호는 실제 대상체를 잠적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호는 실제 대상을 시야 밖으로 사라지게 한다. 실제 대상이 기호 주변에 얼씬거리면 기호가 표상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 기호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거짓을 말하는 능력만큼 강력한 것이다.

김경용

김경용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 기호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이 왜 이리 슬프게 들리는 걸까.

거짓 기호”의 2개의 생각

  1. 비트겐슈타인은 기호를 기호들 사이에 존재할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했지.

    ‘♥’라는 기호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문장과 문단과 단어들, 기호들 속에서 연결될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랄까.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는 법-

    그래서 부처는 열반 직전에 ‘모든 것은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라고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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