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이라크전이 터졌을 때 13세의 소녀 샬롯 알데브론은 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을 보라는 말로 반전 메시지를 전했다.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릿속에는 바로 제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이건 액션영화도, 공상영화도, 비디오게임도 아닙니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놀라게 한 악마성이란 바로 그런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광들은 겁쟁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겁쟁이들만이 전쟁으로 이권을 챙기는 사기꾼들에게 놀아난다. 테러에 대한 공포, 악에 대한 공포로 주눅 들었을 때 사람들은 전쟁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공포로 한없이 웅크들 때 내 안에서 악마가 자라난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파시스트들은 겁쟁이들이며, 겁쟁이들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전쟁을 똑바로 보라.

“세상의 군대가 모두 없어졌을 때, 온갖 무기로 무장한 테러리스트 집단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거냐”던 친구가 생각난다. “차라리 외계인들이 침략해오면 어쩌냐고 하지 그래”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온갖 상상의 적들. 상상 속에서 적들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오직 살육만을 위해 사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한 마디로 ‘괴물’이다.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테러리즘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을 보라. 그들은 ‘괴물’ 상상에 빠져 ‘공포로 주눅’들었고, 결국 상상 속의 ‘괴물’과 싸우다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괴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전쟁으로 이권을 챙기는 사기꾼들’이 퍼뜨리는 ‘괴물’ 상상에 놀아날 때,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 전쟁이 시작된다.

여성

200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 동료들과 중남미 소설을 읽었다. 어떤 호기심이나 필요를 느껴서가 아니라, 연구실에 있는 독특한 세미나 제도 때문에 ‘읽어야 했다.’ 연구실의 모든 회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열리는 어떤 세미나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케포이필리아’라고 불리는 이 세미나는 회원들에게 자기 전공을 떠나 다른 분야로의 횡단을 강제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2005년 하반기 이 세미나의 주제가 중남미 소설이었다.

강제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시작 때뿐이었다. 막상 소설들을 읽기 시작하자 각 작품이 지닌 마력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위주로 읽었는데도, 워낙에 읽어둔 게 없던 탓에 내게는 작품들 모두가 새롭고 강렬했다. 이 소설들 중 특히 내 눈을 끈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멕시코 작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Elena Poniatowska)의 「시네 프라도」가 그것이다. 나는 이 작품이 ‘여성’과 ‘진리’에 대한 남성과 철학자들의 편견을 재치 있게 고발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 분량이 열 쪽밖에 되지 않는, 정말로 ‘짧은’ 단편이다.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린 어떤 남자가 자기가 좋아했던 여배우에게 보낸 편지, 그것이 전부다. 남자는 그녀의 영화 속 이미지에 병적으로 빠져든 사람이다. 그는 항상 그녀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여러 번, 여러 개봉관에서 본다. 그러던 어는 날, 그는 새로운 작품에서 그녀의 이미지가 자신을 완전히 배반했다고 느낀다. 감독의 지시나 시나리오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의 그녀’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절망하고 분개했다. “당신의 가면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속임수가 비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가 하나의 가면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가면 속의 ‘진짜 그녀’는 ‘인간 쓰레기였다’고 흥분한다. 자신이 그 동안 그녀의 연기에 속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그저 그런, 기분 나쁜 ‘팬레터’와 확연히 구분시켜주는 것은 편지 끝에 덧붙여진 ‘추신’이다. 이 추신이야 말로 이 소설의 백미다. 추신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는 어느 날 극장에 가서 영화가 절정에 이를 무렵, 칼을 빼들고 스크린으로 달려가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이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는 그녀의 이미지를 사랑했고, 그 이미지에 배반당했으며, 그 이미지를 살해한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는 제멋대로 여자의 이미지를 그렸고, 여자는 그 이미지를 흉내내어 자신을 만들었다.” 이 독특한 상호작용 속에 어쩌면 서양철학의 근본 문제와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니체는 남자가 여자에 안달하면서도 여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진리에 안달하는 철학자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혹여 여자를 안다고 말하는 남자,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해도, 그가 가진 것으 여자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이미지, 진리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다.

니체는 또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모든 철학자들이 독단론자들인 한 그들은 여자에 대해 지극히 미숙한 게 아닐까. 이제까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때 흔히 쓰던 방식, 즉 대단히 엄숙한 태도로 서투르게 강요하는 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부적당하지 않은가? 그녀가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미숙함. 그녀의 진정성에 대한 그의 독단적인 상상.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을 대하는 철학자의 미숙함도 마찬가지다. 현상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한 상상.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현상의 다양한 생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가면이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옷을 벗기면 그녀의 참된 속살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 한에서 남성은, 철학자는 어리석다.

지혜로운 여성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심오한 본질? 가려진 진정성? 그런 것은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한 남성과 철학자의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표면은 아무것도 가리고 있지 않다. 남성들이 확신하는 ‘진정한 여성’이란 겨우 한 껍질을 벗은 양파에 불과하다. 껍질을 벗긴 후 드러난 것도 껍질이다. 표면이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본질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표면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심오했기 때문에 표면적이었다.”

어쩌면 서양철학은 시네 프라도 극장의 남자가 보여준 정신 나간 짓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 철학자는 프라도 극장의 남자와 다르지 않다.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 그 영상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철학자는 바깥 세계에 그것의 원본이 있다고 말했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자 그는 칼로 자기 눈을 찔러버렸다. 프라도 극장의 남자와 차이가 있다면, 단지 어디를 찔렀느냐뿐이다. 스크린을 찌르거나 자기 눈을 찌르거나. 그들은 모두 표면의 놀이를 즐기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얼굴에 화장하는 법도 모를 것이다.

물론 연기하는 여자 쪽에도 위험은 있다. 니체는 여자들의 타락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남자가 그린 이미지를 연기하던 일부 여자는 그 이미지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평생 그 이미지에 갇혀 산다. 또 다른 일부는 연기를 거부하고 ‘진정한 여성’에 대한 독단적 상상에 빠져든다. 남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하나의 놀이로써 가면쓰기를 하고 있는 여성에 희망을 걸었고,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 했다. 그들은 표면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생성과 변신을 이용해서, 남자들과 철학자들을 유혹하고 파멸시킨다. “완벽한 여자가 사랑을 하면 갈갈이 찢어버린다. ……아,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살글살금 기어다니는 지하세계의 작은 맹수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어찌나 호감을 주는지!”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자들은 이런 여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자들은 이런 여성이 될 수 있을까. 은폐하고 거짓말하고 화장하고 변신하는 일이,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철학의 최고 미덕이 될 수 있을까.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중 ‘여성’.

그는 심각해진 나에게 ‘그냥 놀이’일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진짜’ 그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가 보여준 모든 이미지가 ‘진짜’ 그였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몇 달 전에 했던 그 말을, 이 꼭지를 읽으면서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에게 배운 것들이 정말 많다. 지금까지도.

거짓 기호

소쉬르는 언어를 차이(differences)의 체제로 본다. 차이는 언어뿐만 아니라 다른 기호 체제에서도 의미의 기본적인 근거가 된다. 기호들의 기본적 의미 단위는 기호들이 서로 닮았느냐 서로 다르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적어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기호 사이에서 기호의 기본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결정됨을 암시한다. 하나의 독립된 기호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다. 차이는 낱 기호의 의미의 기본이다.

가령 신호등의 빨간색을 보자. 운전 중에 이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즉시 차에 제동을 건다. <멈춤>의 기의가 빨간색이라는 기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빨간색이 멈춤의 뜻인가? 빨간색이 <멈춤>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빨간색 자체가 그런 의미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파란색과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인위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실제로 빨간색은 <멈춤>만을 의미하는 색이 아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자연 현상으로 볼 때, 빨간색은 실상 <전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스페인의 투사가 빨간 망토를 펴면 투우는 거품을 물고 빨간 기호를 향해 돌진한다. 상어는 빨간색의 냄새까지 맡고 달려가 피를 흘리고 있는 먹이를 물고 뜯는다. 벌들도 두려움 없이 빨간 꽃으로 날아들어 꿀을 빨아간다. 인간의 교통 신호 체제에서 볼 때 동물들에게 빨간색은 인간의 청신호와 같다.

무엇이 같은 색깔을 정지의 신호, 혹은 전진의 신호로 만드는 것일까? 기호들은 모두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 사이에 이루어진 의미체들이다. 기호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생기고 그것은 약속에 의해 굳어진다. 그래서 어떤 계기에 의해 약속이 파기되면 그것은 의미를 상실한다. 약속이 변경되면 의미도 변한다. 약속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하여 관습화됨으로써 한 문화 속에 오래 남아 사람들의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을 은연중에 조정해 나가게 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한 기표가 다른 어떤 것을 표상함으로써 기호가 될 수 있다는 기호의 존재 양식은 참 흥미롭다. 이러한 기호의 표상성을 잘 나타낸 것이 퍼스의 다음과 같은 모형이다.

삼각형이 그려져 있고, 삼각형의 꼭대기 모서리에 '기호(♥)', 왼쪽 모서리에 '개념', 오른쪽 모서리에 '지시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삼각형의 꼭대기에 있는 ‘♥’는 기표로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표상한다. 그림의 왼쪽에 있는 것은 기표에 의해서 인간의 머릿속에 나타나는 개념이다. 그런데 기호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지시 대상을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머릿속에 형성된 ‘사랑’이라는 개념을 환기한다. 그래서 지시대상은 기호 주변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좀 더 나아가면 기호는 실제 대상체를 잠적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호는 실제 대상을 시야 밖으로 사라지게 한다. 실제 대상이 기호 주변에 얼씬거리면 기호가 표상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 기호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거짓을 말하는 능력만큼 강력한 것이다.

김경용

김경용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 기호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이 왜 이리 슬프게 들리는 걸까.

7/27 : 로마

로마에서는 노트에 기록을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한 기록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하루종일 걸어다니자니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사색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특히, 로마는 너무 (더운 게 아니라)뜨거운 날씨였기에, 더욱 빨리 지쳤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짤막한 잡담이나마 기록해둘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지만, 후회해봐야 소용 없는 일.

로마의 거리 사진. 호텔들이 줄지어 서있다.

로마의 거리 사진.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길 끝에는 야자수가 보인다.

스페인 광장. 계단에 많은 관광객들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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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 : 파리

10:07 (Paris)
Père-Lachaise(페르 라셰즈) 묘지. 아침 공기가 맑고 시원하다.

페르 라셰즈 묘지 사진. 묘들이 늘어 서 있다.

10:53 (Paris)
Paris Commune(파리 코뮌)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싸우다 죽은 곳, Mur des Fédérés(뮈흐 데 페데헤, ‘파리코뮌 사람들의 벽’이라는 뜻이다). 장미가 여러 개 꽂혀 있었지만, 다 시들어 있었다. 꽃 한 송이쯤 들고 올 걸 그랬나. 근처에 있던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의 묘와 비교하면, 참 초라해 보였다.

파리코뮌 사람들의 벽.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파리코뮌 사람들의 벽.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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