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포르노에서 남성 관객 혹은 남성화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에 발생한다.

남성들이 연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오가는 얘기는 ‘(여자와) 어디까지 갔냐’일 것이다. 손 잡기, 키스, 애무, 성(교) 관계……, 섹스’까지’ 했다면 흔히 ‘갈 때까지 갔다’고 말한다. 갈 때까지 갔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남성 문화는 남녀 관계의 진도를 대화나 가치관의 공유보다는 상대 여성의 몸에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이는 남성의 본능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학습의 결과이다. 섹스가 남녀 관계의 종착역이라면, 섹스 이후 두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 종착역에서는 버스에서 내리거나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체계에서, 갈아타는 사람은 남성이고 여성은 ‘버스’로 간주된다. 누가 상처 받을까?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매매는 성 보수주의나 윤리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화,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핵심이다. 성매매는 성폭력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도 법 시행 이후 “성매매 방지법은 남성 인권 침해”, “18~32살 남성의 성욕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성매매를 금지하면 강간이 증가하므로, 성매매 허용은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남성의 분노와 흥분은, 이제까지 한국 남성들에게 성이 얼마나 성매매, 성폭력과 동일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성매매는 강간할 권리를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군대 다녀와야 어른 된다, 철든다”, “남자 된다”, “사람 된다” 등 우리 사회의 일상적 언설은, 병역 의무 수행이 시민권뿐만 아니라 문화, 정서, 의식 등 모든 차원에서 ‘인간됨’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러한 인식에서는 “어른, 사람 = 남성”을 뜻하게 된다. 여성을 ‘철들게 하기 위해’ 입대를 권하는 사람은 없다. 군 가산제 논쟁 때마다 등장하는 남성 논리인 “여자들이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한다.”라는 비난이 있는데,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무와 권리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출 경우, 국가는 개인을 ‘국민, ‘시민’으로 인정하고, 국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군 가산제는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면제의 기준을 문제삼아 여성과 장애인의 징병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면제된 의무를 안 했다고 해서 개인의 권리와 생존권(취업권)을 박탈하거나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여성과 장애인은 ‘특권층’이어서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2등 시민’이므로 군 가산제라는 권리도, 병역이라는 의무도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의무나 권리는 국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국민의 기준에 미달하는 2등 시민에게는 의무도 권리도 없다.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전쟁과 군대는 성별화된 제도이자 남성들 간의 계급 정치다. 평화를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지배 계급 남성의 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이들은 전쟁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얻는다. 정작 전쟁에 참가한 혹은 끌려간 남성은 전쟁의 이익과 무관하다. 안타까운 것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자신을 사회적 주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저질렀던 반인도적 행위를 보도한 신문사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는 것으로 주체가 된다. 군 가산제 폐지론에 화가 난 남성들은 현행 징병제를 문제삼는 대신, ‘2등 국민’으로 군대에 가지 못한 여성이나 장애인을 공격함으로써 피해를 보상받으려 한다.

정희진

두 번째로 읽는, 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의 도전”의 2개의 생각

  1. 으음.. 동의하는 부분이 큰 글이야
    /포르노/가 지금의 성적폭력물로만 남았다는게 아쉽군
    교황까지도 풍자하던 그 시절의 포르노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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