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청소년직접행동의날

청소년 죽이는 이명박 정책을 막기 위해 청소년들이여, 5월 17일 거리로 나서자! 대전 으능정이거리 2시,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3시 30분, 서울 덕수궁앞(시청역) 5시, 울산 롯데백화점 7시

5월 17일에 등교거부시위를 하자는, 전국적으로 돌려진 문자메시지 덕에(?) 급하게 준비된 집회. 매일 밤새며 준비한 분들께 박수를.

  1. 광우병 위험 쇠고기와, 건강권.
  2. 4.15 학교자율화조치와, 교육권.
  3. 교육청과 학교의 탄압과, 정치적 권리.

크게, 청소년들의 이 세 가지 권리를 위주로 이야기할 것 같다. 나는 학교자율화조치와 관련, 발언을 하나 할 생각이다.

5.17 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등교거부 시위가 있다는 말에 흥분하며 ‘학생의 본분을 지켜라’고 소리지르는 비청소년들을 몇몇 볼 수 있다. 그들의 흥분이, 청소년의 직접행동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흥분하는 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말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부터 다해라’는 것인데, 의무와 권리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학교에 출석해야 한다는 학생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 그에 대한 처벌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해서 ‘건강권, 교육권, 정치적 권리’ 등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5.17 집회에 교장, 장학사들이 많이 올 것 같다. 말로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온다고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웃음) 부산 집회는 진행요원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그들을 잘 막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이 나라에서, 청소년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마저 억압받고 있다.

이번 집회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나는 꿈꾼다. 청소년들의 이번 ‘직접행동’이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출발점이 되길.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급식, 입시경쟁이 없는 자유로운 학교, 위협받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청소년.

전체가 있어야 하나도 있다

2006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아직 5월이건만 그 날은 무척 더웠다. 지하실은 좀 시원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대를 했건만 웬걸, 지하실은 더 더웠고 게다가 무척 습하기까지 했다. 찜통. 그래, 딱 찜통에 들어와 있는 기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데 그 지하실에 놓여 있는 화이트 보드, 그 화이트 보드에 적힌 문구를 본 순간, 나는 더 숨이 막혔다.

“전체가 있어야 하나도 있다.”

‘하나’였는지 ‘개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두 단어가 크게 차이가 없다는건 다들 아실게다.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체가 있어야 하나도 있다’라니….

2006년 5월, 나는 한 수련원에 있었다. 학교에서 갔던 수련회로.

그 축축하고 더운, 찜통같은 지하실에서, 우리는 그 수련원이 준비한, 서로 마음을 모아 ‘단결’하기 위한 활동들 중 하나를 했다. 우리는 작은 파이프 조각을 하나씩 받았고,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서 다른 사람들의 것과 연결시킨 다음, 공을 그 파이프 위에서 굴려 한 쪽 끝에서 반대 쪽 끝까지 가게 해야 했다. 공이 자신이 들고 있던 파이프를 지나갔으면, 끝 쪽으로 달려가 다시 파이프를 잇고. 어느 팀이 가장 먼저 공을 한 쪽 끝에서 반대 쪽 끝까지 굴리느냐. ‘파이프라인’이라는 이름의 활동.

공이 굴러가다 도중에 떨어졌다. 다시. 또 떨어졌다. 다들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찜통같은 그 지하실에서. 어느샌가 그 짜증은 분노로 바뀌었고, 공을 떨어뜨린 사람에게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어느샌가, 공을 떨어뜨린 사람을 원망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공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기에, 내가 저 사람의 처지가 되어 욕설을 듣지는 않을까 약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활동을 시킨 자에게는 분노하지 못하고, 그 활동이 빨리 끝나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단결? 내가 그 찜통 속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을 편을 갈라 의미없는 경쟁을 시키고, 그 경쟁 속에서 팀이 이기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아니, 내가 배운 것은 단결이 맞았다. 전체의 뜻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해내는 몇몇 ‘하나’들에 대한 전체의 분노, 그것은 ‘단결’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순수한 게르만의 단결을 위해, 그 순수한 게르만이 되지 못하는 자들, 집시・유대인・동성애자・장애인 등의 사람들을 학살한 나치 독일. 나는, ‘파이프라인’을 제대로 못한 자들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나치 독일의 학살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총이 있고 없고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순수한 게르만인들의 독일을 만든다는 목표와, 공을 한 쪽 끝에서 반대 쪽 끝까지 굴리는 목표는 똑같이 너무나도 의미없는 짓이고, 그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자들은 똑같이 배제되었다. (한 쪽은 학살, 다른 한 쪽은 비난과 욕설.)

‘파이프라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활동에서도, 그 수련원은 ‘전체가 있어야 하나도 있다’라는 말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듯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그 가르침을 점차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은 더 괴로웠고.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전체주의’를 그토록 혐오하게 된 것은. 그 수련회를 다녀오기 전에도, ‘전체가 있어야 하나도 있다’ 따위의 문구에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로는 ‘전체주의’의 끔찍함을 느끼고 있었긴 하지만.

나는, ‘전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국기에 대한 맹세, 여러가지 생각들

2006년 7월 21일, 국기에 대한 맹세에 관한 내 생각을 적은 글을 쓴 이후,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나는 앞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은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흥분하며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몇 마디 덧붙인다면.

국민이 곧 국가의 주인인데, 왜 국민이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가. 아니, ‘사랑’하고 싶지도 않다. 국가권력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억압해왔다. 수많은 폭력과 전쟁들. 흔히 사람들은 국가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국가가 국민들을 ‘지켜주는’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국가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 그 국가의 국민인 경우가, 즉 국가가 자국민을 살해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20세기에 국가가 살해한 사람의 수는 약 2억명 정도인데, 그 중 1억 3천만명이 자국민이다. (R.J. Rummel – Death by Government) 저 1억 3천만명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살해된 유태인 등을 들며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기에 더욱 국가는 문제다. 국가는 언제든지 그 내부 구성원 중에서 타자를 만들어 억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늘 억압하고 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억압이 국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자신을 언제든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짝사랑이다. ‘충성’은 말할 것도 없다.

잡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2년이 되어간다. ‘남들은 다 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고 있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습다’는 것이다. 그까짓 국기가 뭐라고 나는 맹세를 하지 않는, 별 것도 아니는 행위를 하며 뭔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착각을 하고 있는가. 우습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더욱 우습다. 이 ‘별 것도 아닌 행위’에 다들 뭔가 엄청나게 심각한 눈빛을 하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이 ‘별 것도 아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교사에게 3개월 정직 징계를 내리기도 한 ‘국가’는 더욱 우습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가 변했지만, 그 덕에 더욱 우습게 되어버렸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니. 네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면 나는 ‘완소 훈남 김동욱’이다. (웃음) 자기 입으로 ‘자유롭고 정의’롭다고 말하는 국가는, 국가가 얼마나 ‘자유롭고 정의’롭지 못한 존재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나도 ‘완소 훈남’이 아니다. (웃음)

뭐, 그냥 그렇다. 이 우스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3개월 정직을 내리긴 하지만) 감옥에 쳐넣거나 하지는 않을 정도는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과, 이 따위 우스운 행위가 강요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며, 아니, 국가라는 거대한 억압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며, 나는 남들이 가슴에 손을 얹을 때 그냥 서 있는다. 우습다.

덧쓰기.
이 블로그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로 검색을 해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급진적(?)으로 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