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아나키 : 번역에 관한 잡설

영화 69 식스티나인에는 주인공이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학교에 걸리는 현수막의 구호 중에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구호는 68혁명 당시 나왔던 구호 중의 하나인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를 연상케 한다.

어제 아수나로 부산지부 모임에서 ’69 식스티나인’을 감상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서로 느낌을 말할 때 님이 저 구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었다. ‘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권력’을 꼭 쟁취해야 하는가, 라고. 이에 호적돌이 ‘권력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는데, 나는 휴님의 지적에 대해 ‘번역의 문제’로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이 이야기는 어제 모임에서 했어야 하지만, 나는 그 때 지금 쓰려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요새 블로그에 쓸만한 글이 없기도 하고. (웃음)

’69 식스티 나인’ 영화의 흐름을 볼 때,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구호는 68혁명의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구호로 보인다.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는 프랑스어 ‘Pouvoir à l’Imagination.’(영어 ‘Power to the Imagination.’)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Pouvoir’ 혹은 ‘Power’를 ‘권력’으로 번역하는게 과연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불한사전이나 영한사전에서 저 단어를 찾아보면 ‘권력’이라는 뜻이 나오지만, 68혁명의 구호에서 ‘권력’이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듯,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억압적 분위기에 반대하며 일어난 68혁명의 구호에, ‘남을 복종시킬 수 있는 힘’을 뜻하는 단어가 과연 어울릴까?

‘권력’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authority’가 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그러나 반대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power’를 한국어로 ‘권력’이라고 번역하는게 꼭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power’를 ‘권력’으로 번역했을 때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68혁명의 구호에서는 아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휴님과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그 지적을 들었을 때 ‘역시 아나키하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휴님은 자신이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지만, 아나키스트는 아니’라고 하지만.

‘아나키’도 ‘권력’과는 조금 다르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 되지 않은 경우가 아닌가 싶다. 대개 ‘아나키’와 ‘아나키즘’을 ‘무정부 상태’,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만, 별로 좋은 번역은 아니다. 물론 ‘anarchy’는 ‘not’, ‘without’을 뜻하는 접두사 ‘an-‘과 ‘rule’, ‘government’를 뜻하는 ‘-archy’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니, ‘무정부 상태’라고 번역하는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나키’를 단순히 ‘무정부 상태’라고 번역하는데는 조금 무리가 있다. ‘-archy’가 갖고 있는 또다른 뜻인 ‘rule’의 의미를 보자. ‘규칙’, ‘법규’, ‘규범’, ‘관례’, ‘지배’, ‘통치’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아나키’의 ‘rule이 없는 상태’가 가리키는 ‘rule’이 ‘법규’, ‘관례’, ‘지배’, ‘통치’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 앞의 다른 뜻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아나키즘 사회에서라도 ‘규칙’과 ‘규범’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100명의 아나키스트, 100개의 아나키즘’이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 ‘아나키’를 정의하기는 힘든 일이다.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은 ‘rule’의 의미는 완전히 무시해버린다는 점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의 ‘정의내리기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에도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를 ‘힘을 상상력에게로.’라고 바꾸자니 뭔가 어색하고,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이 그리 좋지 못하다고 해서 원어 그대로 계속 ‘아나키즘’이라고 쓰는 것도 그리 좋지 못한 것 같다. 좋은 번역이 없을까.

덧쓰기.
‘권력과 아나키 : 번역에 관한 잡설’라는 제목, 횡설수설하는 이 글에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한 제목이다. 게다가 뭔가 위압감을 풍기는게 ’68’이나 ‘아나키’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웃음)

권력과 아나키 : 번역에 관한 잡설”의 5개의 생각

  1. 여긴 참 덧글 달기가 어렵단 생각이 드는구랴. 발언조차 권력이고 즐거움조차 권력이 아닌지=_= 뭐…아나키고 뭐고 정작 당사자는 그런걸 상관도 안하는데 뭘 ㅋㅋ 아 그리고 휴는 자신을 아나키라고 하던데. ‘다 각자 자신만의 아나키가 있다’ 정도로 정의를 내리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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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참고로 이틀 전인가 덧글 입력했는데 오류라면서 안 써져있길래 걍 귀찮아서 안 달았어 여긴 참 댓글 달기 힘들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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