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우리들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할부로 사는 맛 —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또는 그녀는)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본다. 남자에게는 매력있는 여자 —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남자 — 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있고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공포는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실제적 위험에 대한 공포로서 합리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서양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의 의견일치는 ‘자신의’ 견해가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 놓은 머릿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 — 바라본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가 노래하듯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은 아니다.

성적 욕망은 융합을 지향하지만 결코 육체적 욕망, 고통스러운 긴장의 해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되고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Erich Fromm

에리히 프롬(Erich Fromm)사랑의 기술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자본주의와 자유

자유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인이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 그러한 주장이 설득에 그치고, 폭력이나 다른 형태의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한 — 선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자유가 갖는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정치적 자유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도입을 자유로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보장되고 유지 될 수 있을까?

대우의 진정한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에 따른 지급이 필요할 수 있다. 능력이나 출발시점에서 보유한 자원이 같다고 전제해도, 무방한 개인들을 놓고 보더라도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여가를 더 선호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물을 더 좋아한다면, 시장을 통한 수익의 불평등은 총 수익의 평등이나 대우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급료를 많이 주는 고된 직장보다는 여가시간이 더 많은, 틀에 박힌 직장을 선호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평등하게 같은 금액의 보수를 받는다면 그들의 소득은 더욱 근본적인 의미에서 불평등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균등한 대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저분하고 흥미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쾌적하고 보람 있는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불평등의 많은 사례가 이 경우에 속한다. 화폐 소득의 격차는 직업이나 사업의 여타 특성에 따른 격차를 상쇄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이 격차들은 금전적·비금전적 ‘순이익’의 총량을 똑같게 해주기 위해 필요한 ‘균등화 격차equalizing differences’다.

Milton Friedman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대표적 저작, 자본주의와 자유.
책을 산 지는 좀 되었는데, 이제야 읽어봤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요즘 신세대 커플이 100일을 넘기기 어려운 것도 내적 충만감보다 인정욕망에 휘둘리는 이런 식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정욕망에 길들여지면 당연히 외적 조건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된다. 남들이 보기 좋은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남들을 위한 것으로. 참, 희한한 이타주의(?)다. 근데, 그럼 그게 사랑인가? 쇼 혹은 비즈니스지.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고미숙

여울바람님이 추천해주셔서 읽게 된 책. 좋은 책이다. 나의 ‘남들에게 추천해줄만한 책 목록’에 오를만한 책. (웃음) 다만, 추천해줘도 사람들이 (제목 때문에) 읽어보기도 전에 거부감을 갖는 게 좀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