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왠지 모르게, 그에게 화가 났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낼 수는 있어도, 내가 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딱 오늘 하루만, 슬프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화가 난 척 했다. 아무도 봐 줄 사람이 없었지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그가 ‘인생의 반할을 결정짓는다고 믿어지는 시기’, 그 시기만 이야기한채 대화를 끊었다면, 나는 이렇게 화난 척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했던, 그 사람이 부러웠다. 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버스에서 내렸다. 패스트푸드점. 만나기로 한 장소에,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카라멜 마키아또. 3천원. 지갑 속에는 2천원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천원이 넘는 수수료를 물고, ATM기에서 만원을 뽑았다. 마시고 싶었다.

커피 위의 거품을 바라보다, 한 모금.
문제는 키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 바로 그것, 키. 그래, 늘 그랬다. 지난 삼 년, 세 명의 그들.
키가 작고 귀여웠던, 첫번째 그는, 나보다 키가 20cm 큰 남자를 선택했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거절한다는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늘 ‘남자는 우선 키가 크고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던 두번째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상형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제일 먼저 ‘키 큰 사람’을 꼽던 그는, 지금 내가 화가 나 있는 그는, 나보다 10cm 큰 그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 사람은 되지만, 나는 안 된다.

이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왔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저 멀리 앉아 있는, 내 또래의 여자들을 자꾸만 쳐다 보았다. 그 여자들의 얼굴 위로, 그의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 나는 그 여자들을 자꾸만 쳐다 보았다. 만약 내 키가 컸다면, 그는 나를 거절했을까.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한 잔만 더 마실까.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라멜 마키아또. 4천 8백원. 한 끼 식사보다 더 비쌌지만, 그래도 오늘은 왠지 마시고 싶었다. 거품.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1800원이라는 돈이 꽤나 차이가 크구나 생각을 했다. 10cm라는 키도 꽤나 차이가 크겠지. 커피를 마시면 키가 크는데 방해가 된다지만, 오늘 하루 뭐 어때.

언제부터인가, 내가 성적표로 이루어진 덩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했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지 않으면, 내가 수학 1등급을 받지 않으면, 내가 이번 학기에도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적표로 이루어진 덩어리이기에, 그 성적표가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내가 계속 해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면, 모두가 나를 외면할 거라는 생각.

더 이상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도,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카라멜 마키아또. 천 2백원. 편의점에서 커피를 집어들었다. 세 명의 그들,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속이 메스꺼운데도, 나는 억지로 마셨다. 그렇다, 나는 쇼를 하고 있었다. 내가 쇼를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가 큰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좋은 성적표를 받는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제 정신이 아닌 생각임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 내가 키가 좀 더 컸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해줬을까. 사랑. 부모님은 나에게, 내가 아름다운 아내를 얻으려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주류 사회의 시각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려면, 경제적 여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돈, 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속물 같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속물. 사실 내가 제 정신이 아닌 척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싫기 때문이다. 나는 속물이었다.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듯, 나는 철저히 주류 사회, 속물인 사회가 좋아할만한 사람들만 사랑했다. 그들의 성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외모를 가장 먼저 보았고, 성격은 그 외모에 맞춰 합리화시켰다. 나의 키, 나의 외모. 내가 그들을 그렇게 본 것처럼, 그들이 나를 이렇게 보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싫었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보는게 싫은데, 나는 그들을 그렇게 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약간의 과대망상과 우울증. 언젠가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상담가는, 나의 장점 20가지를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적었다.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20가지 이상이라는 것을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에게 장점이 하나도 없어도, 나를 안아줄만한 누군가가 나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겐 필요했다. 내가 키가 작아도, 내가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한다더라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 그의 외모가 어떻던 간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나.

나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를 걱정해주실 분들, 만약 있다면,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다. 나는 카페인에 취해 잠시 과대망상과 우울증에 걸려 있을 뿐이다. 오늘 밤 잠이 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돌아와 있을 것이다. 치료받아야 할 병든 제품에서, ‘정상적인’ 제품으로. 그런데,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셨으니, 오늘 밤 잠이 들 수 있을까?

나는 달라지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의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사랑을 한 적이 없다. 카라멜 마키아또를 사서 마시듯, 나를 팔아 그들을 사고자 한 것일 뿐. 부모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속물 같겠지만, 세상은 원래 이런 거라고. 지금의 나는 내 외모를 팔아 그들의 사랑을 사야 하고, 미래의 나는 ‘경제적 여유’를 팔아 그들의 사랑을 사야 한다. 그 경제적 여유를 얻기 위해, 나의 성적표는 계속 좋아야 한다. 괴롭다. 속물인 나는 괴로운데,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괴로울까? 모르겠다.

세 명의 그들, 세 번의 좌절, 세 잔의 카라멜 마키아또.
그리고, 세 번의 사랑을 했다고 믿는 속물 ‘한 개’.

고통스러운 공부?

공부는 재미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 가끔은.
하지만, 분명히 공부는 재미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공부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하는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물론, 그 공부도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현진씨가 지적했듯) 그것이 ‘일차적인 사실들을 반복적으로 암기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단순노동에서 오는 즐거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는, 적어도 사회과학 쪽의 공부(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분야뿐이다. 다른 분야도 그럴 것이라고 유추하긴 하지만.)는, 의미를 갖지 못하게 쪼개지고 또 쪼개져 버렸다. 그것들은 분명히, ‘메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져야 하는데 말이다.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보면, 책을 통해서 봤을 때는 상호 연관되어 설명되었을만한 개념들이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 채 가득 들어있다. 이러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부가 재미없는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을 단순 암기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미 없는 공부’만을 공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결국, 그들에게 공부는 고통이 되어버리고, 공부라는 것은 좋은 대학에 가고자, 좋은 직장을 얻고자 하는 의미 없는 강제노동이 되어버린다. 그런 고통 속에서 헤매는 동안, 그들의 뇌는 죽어버리고, 그들은 ‘똑똑한 바보’가 되어버리고 만다. ‘똑똑한 바보’들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학교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며 이러한 강제노동을 합리화시키는 말이 넘쳐난다.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책상에 적어두기 이전에, 한 번 생각해보라. 과연 공부가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며, 재미있는 것이다.

물론, 늘 재미있을 수는 없겠지.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듣기 싫은 때가 한 번쯤은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넓게 볼 때, 공부는 재미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공부가 있다면, 그런 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마찬가지로, 당신은 누군가에게 늘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당신의 뇌는 그 가르침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당신은 그것들을 모두 다 거부하고 스스로 ‘똑똑한 바보’가 되려고 하고 있다.

덧쓰기.
그런데 당장 그만두고 싶어도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게 문제다.

반미?

최근에, 미국 정부의 행동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 나 자신을 포함해서 — ‘반미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미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반미적’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성 체제가 비판자들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정확하게 —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단 누군가가 반미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의 발언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되며, 논리는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반미적’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재즈에 반대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언론자유에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토니 모리슨이나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거대한 미국산 삼나무를 싫어한다는 것인가요? 핵무기에 반대하여 행진한 수십만 미국 시민들이나, 그들의 정부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압력을 넣은 수많은 반전 운동가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반미적’이란 모든 미국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인가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의 ‘자유언론’ 덕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슬프게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을 미국의 문화, 음악, 문학, 숨막히게 아름다운 땅,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하게 하는 것은 고의적이며, 극히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이것은 마치 퇴각하는 군대가, 적(敵)이 민간인을 향해 포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인구가 밀집된 도시 속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정책과 자신이 연관되는 것에 대해 모욕을 느끼는 미국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의 모순과 위선에 대한 가장 학문적이고, 신랄하고, 예리하며, 통쾌한 비판은 미국 시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미국 정부의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면,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에드 허만, 에이미 굿맨, 마이클 앨버트, 찰머스 존슨, 윌리엄 블럼, 그리고 앤서니 에이무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수백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테러리즘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카시미르 계곡에서 자행된 국가적 테러리즘은 논외로 치더라도, 구자라트 주정부의 감독 아래 무슬림들에 대해 저질러진 최근의 학살만행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 현재의 인도 정부의 파시스트적인 정책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심히 부끄럽게 여기고 매우 분개할 것입니다.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인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인도 정부 자신은 주저없이 그렇게 나갈 것이지만 말입니다. ‘인도’나 ‘미국’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밝힐 권리를 인도 정부나 미국 정부 혹은 그 누구에게라도 양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또는 ‘반인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기성 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부시가 아니면 탈레반이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과 한패다. 이런 식입니다.

작년에,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9 . 11 이후의 수사(修辭)에 대해 그것을 어리석고 교만한 것으로 무시하면서 비웃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전혀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잘못된, 위험한 전쟁을 위한 모병 작전이었습니다. 날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대가 곧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에 경악하곤 합니다. 이 전쟁의 애초의 목표 —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산 채로든 시체로든) — 가 좌절된 것으로 보이는 지금, 과녁은 이미 다른 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 여성들을 ‘부르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합중국 해병대가 페미니즘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우리더러 믿으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인도에는 ‘불가촉 천민’,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혐오스러운 사회적 관행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집단과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더욱 혹심합니다. 그러니, 거기에도 폭격을 해야 합니까? 델리와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해야 합니까? 인도의 저 완고한 관행을 폭격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요? 폭격을 통해서 우리가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 노예제는 어떻게 없어졌습니까? 미국은 수백만의 토착 아메리카인들을 학살하여, 그 시체 위에 건국을 하였습니다. 지금 산타페를 폭격함으로써 그 인종학살이 보상될 수 있을까요?

Arundhati Roy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

코뮨주의 선언

로자는 계몽주의자들, 즉 ‘전위당 노선’과 달리,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나타나는 힘들에 운동을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용한 이 ‘저절로’라는 말은 추수주의자들이 곧잘 빠지곤 하는 낙관론이나 숙명론과는 관련이 없다. 이 말은 오히려 기계적 필연성을 깨뜨리는 어떤 결정 불가능성의 필연적 도래, 다시 말해 결정을 불가능케 하는 대중의 자발성과 능동성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다. 어떻게 결정 불가능한 대중, 자기 극복의 잠재성을 지닌 대중을 지도하거나 추종할 수 있겠는가.

고병권

그러나 실제로 현실은 이분법적이지 않고, 차악의 선택으로 제시된 대답들은 엉터리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이런 이분법은 환상이다. (중략) 가령 우리는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를 피하기 위해 국가를 차악으로 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상 약육강식의 논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 질서의 내부에 기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이다. 많은 이들이 빈곤을 피하려고 신자유주의로 편입을 택하지만 우리는 이런 편입을 통해 모라토리엄 상태에 빠진 국가들을 목격한다.

진은영

코뮨주의 선언. 아직 다 읽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