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옌데, 피노체트

아옌데 사건이란 미국에서 교육받은 토호들의 2세인 ‘시카고 보이’들이 군인들과 결탁하여 민중정부를 붕괴시킨 사건이다. 당시 칠레는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고 국제적인 위상도 훨씬 높았던 선진국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단순한 쿠데타로 보이지만 그 안을 보면 식량자본의 음모가 있다.

1970년 아옌데는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하려고 했다. 당시 칠레는 높은 유아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아동영양문제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가장 곤란함을 느꼈던 것이 스위스의 다국적기업인 네슬레였다. 커피와 우유를 주품목으로 하는 네슬레에게 칠레정부가 분유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칠레에서의 성공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 경우에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네슬레는 칠레의 농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당연히 네슬레는 협력을 거부했다. 아옌데정부는 네슬레에게 우유 구매를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이때부터 아옌데 정부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CIA와 결탁한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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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이 정한 국제인권의 날인 10일 산티아고의 국군통합병원에서 심장질환 등으로 사망한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

그는 칠레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 군인 출신이다. 1973년 육ㆍ해ㆍ공군은 물론 경찰군까지 통솔하는 총사령관이 된 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가 쿠데타로 전복시킨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는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민주정부였다.

1973년 9월 11일 각 지역의 방송국을 장악하며 쿠데타를 시작해 대통령궁이었던 모네다궁을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공군 전폭기를 동원해 공격을 가했던 피노체트는 잔인하게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고(물론 당시 피노체트 군사정부에서는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스스로 군사평의회 의장이 됐고, 그 다음 해인 1974년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쿠데타에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한 피노체트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칠레의 경제를 심각할 만큼 궁핍하게 만들었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자유 경제는 사망했으며 미국과의 교역도 어렵게 만들었다며 경제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미국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한 기술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들이 제기한 미국식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적극 받아들였다. 기간산업인 도로 건설, 농촌 개발, 수출 주도형 산업의 육성 등으로 칠레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듯 했다.

특히 피노체트의 적극적인 지지자인 미국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또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엄청난 도움을 받았던 영국 정부도 피노체트의 경제 개혁을 힘껏 도왔다. 그리하여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피노체트를 칠레 경제의 부흥을 이끈 선구자로 칭송했고, 또 미국의 보수적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먼은 그 같은 피노체트의 노력에 대한 결과물을 세계 경제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피노체트가 집권한 동안 칠레 경제는 이전 아옌데 정부에 비해 300배 성장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이는 지표일 뿐, 정작 칠레에서는 각종 국영 기업들의 민영화로 인해 심각한 실업 사태가 초래됐고, 외형상으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치유 불가능한 빈부 격차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국의 지원으로 도로와 건물, 그리고 공장 등이 급격히 늘었으나 이를 소유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민중들은 극빈자 신세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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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다정했던 그들은 갈 때도 함께 갔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0일 91세로 타계했다. 지난달 16일 그가 생전에 자유시장주의를 구현했다는 이유로 인권탄압에 눈감았던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이 세상을 떴고, 피노체트의 재임 시절 산티아고의 대통령 관저에서 종종 담소를 나누면서 남미의 지정학적 틀을 자문했던 네오콘의 대모 진 커크 패트릭 전 유엔주재 미대사가 지난 7일 숨졌다. 20여일 만에 함께 이승을 떠났다.

칠레가 ‘더러운 연대기’를 닫은 이날은 공교롭게도 유엔국제인권의 날이었다. 백악관은 이날 성명을 내 “피노체트의 독재기간 칠레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면서 “오늘 우리의 생각은 독재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과 함께 한다. 칠레 국민들이 자유와 법치, 인권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기를 추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냉전시절 미국이 뒷배를 보아준 피노체트 집권 17년 동안 ‘자유’와 ‘법치’, ‘인권’은 칠레 국민들에겐 먼나라 이야기였다. 쿠데타를 밀어준 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공개된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문서에서 드러났다.

칠레의 비극도 ‘9・11’로 시작됐다. 1973년 이날 피노체트가 이끈 쿠데타군이 모네다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민주선거를 통해 처음 집권한 중남미 첫 좌파정권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측근을 투항시키고 홀로 남아 있다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70년 아옌데 대선 승리에 “무책임한 칠레 국민들로 인해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왜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CIA를 통해 수백만달러를 칠레군 장교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줬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환호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는 커크 패트릭이 피노체트와 함께 남미 지정학을 설계했다.

피노체트는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듬해 대통령이 된 그는 국회와 정당, 언론자유, 인신보호영장제도, 노동조합을 없앴다. 2만7천명이 고문과 옥살이를 했고, 3,200명이 피살되거나 실종됐으며 50만명이 망명 길을 떠났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재갈을 물린 피노체트는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경제 부흥에 전력했다. 세계 최초로 칠레에서 실험된 자유주의 경제모델은 이른바 ‘시카고 아이들(Chicago Boys)’로 불리던 시카고대학 경제학부 출신 관료들에 의해 추진됐다. 프리드먼은 칠레를 방문, ‘기적’이라고 치켜세웠다. 피노체트의 업적이라는 경제성장도 실상은 지표상의 성장일 뿐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다. 칠레의 자유주의 모델은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 등 신자유주의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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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옌데와 피노체트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슬픔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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