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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켈리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구호를 처음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자, 독일 녹색당 창당을 이끌었으며 초대 의장을 지내기도 한 페트라 켈리(Petra Kelly)의 전기 1를 도서관에서 훑어봤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처음 언급한 맥락이 궁금해서였는데, 아쉽게도 궁금증에 답이 되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다. 2

같은 도서관에 페트라 켈리 본인이 쓴 책 «희망은 있다»도 있던데, 얇은 책이어서 두어 시간 만에 죽 읽어볼 수 있었다. 페트라 켈리가 대단히 헌신적인 활동가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 유행어를 빌리자면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구절도 있었다. ‘여성과 생태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장(chapter)에 실린 구절이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일어나 이전에는 한번도 볼 수 없던 생명력과 창조력을 반핵평화운동에 불어넣고 있다. 여성들이 법정에 나가 자연방사능과 인공방사능의 차이를 설명한다.

— pp.158-159.

“자연방사능과 인공방사능의 차이”라고?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바로 다음 쪽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여성은 평화를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적 노력에 힘을 실어야 한다. 이는 남자들이 대부분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며 자연개발과 군사적 자아도취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여성은 자신의 자궁, 자신의 뿌리, 자신의 자연적 리듬, 평화와 조화를 향한 자신의 내적 탐색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p.160.

‘남성적 가치’를 “권력투쟁”, “군사적 자아도취” 등으로 보는 페트라 켈리의 견해는 단지 비유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다음은 ‘평화는 가능하다’라는 제목의 장(chapter)에 실린 E. F. 슈마허 추모강연문의 내용이다.

오늘날 핵무기 경쟁이 많은 부분 남성적 행동에서 기인한 결과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대과학은 기본적으로 남성적 노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 인간의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기름을 부어 더욱 악화시키는 국가와 군사동맹 간의 경쟁 체제에서 발전되고 있습니다. 남성적 과학과 남성적 사고방식은 1968년 오스위츠 집결부대에서, 드레스덴에서, 나가사키에서, 베트남에서, 그레나다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프라하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나는 무기경쟁을 미친 짓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남성들이 여성적 가치, 여성과 자연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세계에서 과학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 p.58.

이러한 끔찍한 전쟁과 살육을 남성 일반의 탓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대다수 남성은 대다수 여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쟁의 희생자이며, 가해자는 이 모든 살육을 명령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자들, 즉 지배계급이며 이들이 지배하며 서로 경쟁하는 “국가와 군사동맹 간의 경쟁 체제”, 즉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이다.

하지만 페트라 켈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데, 이 견해가 품은 오류는 바로 두 문장 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마거렛 대처나 인디라 간디와 같이 오늘날 권좌에 오른 여성들은 자신들을 남성적 가치와 남성적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춤으로써 현재의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입니다.

— p.58.

마거렛 대처나 인디라 간디가 “자신들을 남성적 가치에 (…) 끼워 맞”춘 여성들일 뿐이라며 간단히 넘긴다면, 이 목록에 박근혜는 들어갈 수 없겠는가? 앙겔라 메르켈은? 이런 식으로 모순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이 견해가 품은 오류를 더욱 선명히 드러낼 뿐이다. 3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게 말이 된다면, ‘여성적 가치’와 ‘남성적 가치’가 아니라 ‘고양이적 가치’와 ‘개적 가치’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홍차적 가치’와 ‘녹차적 가치’는 또 어떤가? 이것은 이론적 설명이 아니라 그저 자의적 틀에 세상을 끼워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자연방사능과 인공방사능의 차이”로 돌아가자. 간단히 말하건대, 차이는 없다. 핵무기와 핵발전을 옹호하는 자들의 프로파간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과학적 무지(無知)에 기초해서 반박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면서 “남성적 과학” 운운하며 “여성들이 법정에 나가 자연방사능과 인공방사능의 차이를 설명”했다고 자랑스레 소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여성의 지성(知性)에 대한 모독이다.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1. 한국어판은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2. 도움이 되는 책을 알고 계신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3.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절이 나온 글은 E. F. 슈마허라는 ‘남성’을 추모하는 강연문이다. E. F. 슈마허는 자신을 여성적 가치에 끼워 맞춘 남성이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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