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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변증법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의 «性의 변증법»을 주말 이틀에 걸쳐 읽었다. 몇몇 부분을 발췌해서 옮겨둔다. 표시해둔 쪽수는 1983년에 나온 도서출판 풀빛 판(김예숙 옮김) 기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기에 비판적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지만, 생략하고 글만 옮겨두기로 한다. 딱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16~17쪽의 엥겔스에 대한 언급은 엥겔스 저작의 완전한 오독(誤讀)이라 생각한다.

우선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행동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진화되어 왔고 어떤 제도들을 통하여 작용해 왔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하에서 갈등을 종식시킬 수단을 발견하기 위하여 대립 antagonism이 생긴 사건들의 역사적 계보를 세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경제혁명을 위하여서는 계급대립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던 것처럼 여성해방혁명을 위하여는 포괄적인 성(性) 전쟁역학 the dynamics of sex war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더 포괄적인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더 큰 문제, 기록된 역사를 넘어서 동물의 세계에까지 소급되는 억압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석을 시도하는 데 있어,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많은 것을 시사받게 되는데, 그것은 여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 자체—그들은 억압된 계급 자체로서의 여성의 조건에 관해서는 모르고 그것이 경제와 연관되는 부분에서만 인정하였다—가 아니라 그들의 분석적 <방법>에 의해서이다.

— p.14.

여성의 억압을 엄격히 경제적 해석에 의거하여 설명하려는 것은 오류이다. 계급분석은 훌륭한 작업이지만 제한적이다. 즉 일차적 의미로서는 정확하지만 심층적이지 못하다. 엥겔스는 때때로 사적 변증법의 성적 하부구조 sexual substratum를 희미하게 인식했으나,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서 환원시키면서 성 sexuality은 경제적 여과기 economic filter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서 평가할 수 없었다.

엥겔스는 최초의 노동분업은 자녀양육의 목적을 위하여 남녀간에 존재했으며—가족 안에서 남편은 소유주이고 아내는 생산수단이며 자녀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인간종족의 생식 reproduction은 생산수단 means of production과 구별되는 중요한 경제체계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한 계급으로서의 여성의 억압에 관하여 인식했다는 것 때문에 너무 큰 점수를 받아왔다. 사실상 그는 성적 계급체계 the sexual class system가 그의 경제적 구조와 일치하고 경제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만 그것, 즉 성적 계급체계를 인정했다. 엥겔스는 이 부분에 있어서 그렇게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더 명확하지 못했다. 여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편견(모든 교양있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 있어서도 공통된 문화적 편견)에 관한 인식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여성해방론을 정통마르크스주의 준거틀 orthodox Marxist framework—성계급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연한 통찰이 교조 dogma화한—에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 또한 점차 증대되고 있다.

— pp.16-17.

그러한 범주들을 가정하기 전에, 생물학 그 자체인 생식 procreation을 이원론의 원천으로 보는 분석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여보자. 성의 불평등한 분화는 ‘자연적’이라는 일반인들의 즉각적인 가정은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것 이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경제적 계급과는 달리, 성적 계급은 생물학적 현실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했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만들어졌고, 평등하게 특권을 누리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드 보봐르가 지적한 대로 차이 그 자체가 계급 체계—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것—의 발전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생식 <기능>의 차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 p.19.

여성해방론적 운동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것이다. 이것은 관계의 새로운 방식 즉 새로운 정치적 방식을 발달시키고 있고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것—언제나 여성적 특권인—과 공적인 것, ‘바깥 세상의 것’을 화해시키는 방식, 그 바깥 세상을 그것의 정서와 감각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방식을 발달시키고 있다.

정서와 지성 간의 이분법은 기존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갖는 일을 방해해 왔다. 한편에는 정통적인 좌익주의자들, 구체적인 현실과는 절연된 추상적인 상아탑의 지성인들, 또는 행동주의자를 가장한 채 정치적 효율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의 행동에 탐닉하는 전투적으로 <남성적인>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우드스독 국가 Woodstock Nation, 반항청년들 the Youth Revolt, 히피들 Hippies, 이피들 Yippies(정치적으로 활동적이고 무정부적인 히피들:역주),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Crazies, 괴상한 사람들 Motherfuckers, 거친 사람들 Mad Dogs, 시골사람들 Hog Farmers이 있다. 이 후자의 사람들은 구식의 전단 살포, 팜플렛 돌리기,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대치할 그들 자신의 확고한 역사적 분석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그들은 정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완고하고 구식인 분석 때문에 주변적이고 분열되고 비효과적인 것이 되거나, 아니면 대중운동적 호소력을 가진 곳에는 역사와 경제에 확고한 기초를 두지 못한 혁명가라기 보다는 ‘낙오자’들만 있어 실패한다. 여성해방론적 운동은 절실하게 요구되는 연결점이다.

— p.49.

현재 우리는 <가부장제주의 patriarchalism>, <자본주의>(조합자본주의 corporate capitalism), 그리고 동시에 두 문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는 곧 혁명을 위한 세 벌의 선결조건들을 가질텐데, 과거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가능한 것과 존재하는 것 간의 차이점은 혁명을 초래하는 힘이다. 우리는 성적, 그리고 경제적 혁명뿐만 아니라 문화적 혁명에도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경험적 지식의 눈덩이가 그것 자체의 속도 때문에 깨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 세기만에 혁명을 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경제적 혁명과 같이 문화적 혁명도 시초부터 계급의 (성)이원론뿐만 아니라 문화적 분화의 (성)이원론의 제거에 입각되어야만 한다.

(…)

우리는 문화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인간성은 자연을 완전히 정복했을 것이고, 그 꿈을 <현실적으로> 실현시켰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실제적으로 완전히 성취했으므로 문화라는 대리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소망충족에의 우회로인 승화과정은—지금은 아이들이나 약물을 사용한 어른들만 느낄 수 있는—경험의 직접만족으로 대치될 것이다(비록 정상적 성인들은 다양하게 ‘유희’를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에게 더 즉각적으로 미래의 경험의 강열한 차원을 설명하는 예란 성취의 눈금에서는 0을 표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것을 대신할 것이 없어’—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고자 하는 것은 성교이다). 자아에 의해서 ‘원본능’의 만족이 통제되고 연기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원본능>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쁨은 성취의 질에서보다 존재와 행동 자체, 경험과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남성의 <테크놀로지의 양식>이 여성의 <미의 양식>이 상상해온 것을 마침내 현실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두 양식에의 필요를 제거할 것이다.

— pp.191-192.

위험스럽게 증가하는 출산을 제한하는 데 있어서의 새로운 과학적 발달은 무엇인가? 이미 우리는 역사상 전보다 더 많고, 더 좋은 피임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임신을 방해하는 구식의 방법들(diaphragms, Condoms, foams, jellies)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 우리는 복잡한 전생식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것이고, 호르몬의 섬세한 역학과 신경체계에 대한 전체적 영향을 완전히 이해할 것이다. 현재의 구강피임법은 원시적(불완전한)인 단계에 있을 뿐이고, 실험 중에 있는 많은 종류의 출산제한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공수정과 인공배란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태아의 성의 선택, 시험관에서의 수정(질 안에서의 정자의 능력이 완전히 이해되었을 때)은 곧 실현될 것이다. 여러 팀의 과학자들의 인공태반의 발달을 위해 작업하고 있다. 단성생식—동정녀 출산—조차 곧 발달될 수 있는 것이다.

— p.197.

생식의 새로운 방법들에 관한 공포는 너무 널리 퍼져 있어서, 이 책을 쓰고 있는 1969년에 그 주제는 과학자들의 서클 밖에서 여전히 금기에 속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많은 여성들조차—특별히 여성해방운동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나—그것에 관한 관심을 표현하기를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비자연적’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의 의혹을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반모성적이고, 친인공생식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 많은 정력을 쏟는다. 그렇게 그들이 두려워한다면, 내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겠다.

<임신은 야만적이다>. 나는 현재 임신이 아름답지 않게 보여지는 이유가 엄밀하게 문화적 왜곡 때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저 뚱뚱한 부인은 왜 저래?”라는 어린이의 첫번째 반응, 죄책감에 기인한 남편의 성욕 감퇴, 그리고 8개월 때 거울 앞에서 여성이 흘리는 눈물 등 이러한 것들은 문화적 습관이라고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정직한 반응들이다. 임신은 종(種)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육체가 임시적으로 불구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출산은 <고통을 준다>. 그리고 고통받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3,000년 전 ‘자연적으로’ 분만한 여성들은 임신이 진정한 경험이고 신비적인 오르가즘이라고 가장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은 임신이 고통이고 수고라고 말했다. 여성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마술은 불필요했다. 그들은 감히 시끄럽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분만시에 그들이 원하는 만큼 크게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

오늘날 이러한 모든 것은 혼돈되어 왔다. 자연분만에 관한 숭배 자체가, 우리가 자연과의 진정한 일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가를 말해준다.

— pp.198-199.

인구조절과 사이버네이션의 두 문제는 신경과민적이고 피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전례가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과 생식과, 인간성 사이의 기본적 관계의 질적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출산조절과 사이버네이션의 심각한 효과에 대처하기 위하여 인간관계와 대중오락에 관한 급진적인 재정의에 기초를 둔 새로운 문화를 거의 하루밤 사이에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게 급진적으로 생산과 생식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 계급제도를 한꺼번에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누가 ‘성공하는지’에 관해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아무도 ‘노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수완이 있거나 숙련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기계가 노동을 더 잘하는 사회에서는 직업을 차별할 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들은 노동의 착취에 기초를 둔 계급제도를 말살하는 완전한 평등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

여성해방혁명은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즉 인구폭발에 대한 관심, 생식에서 피임으로 그 강조점이 전환된 것, 그리고 인공생식의 완전한 발전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 가족의 억압에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네이션은 작업과 임금과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리고 활동을 ‘노동’에서 ‘유희’(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활동)로 변형시킴으로써 경제능력을 가진 가족단위를 포함하여 경제에 대한 완전한 재정의를 준비할 것이다. 남자는 이마의 땀으로 땅을 갈고 여자는 고통과 수고로 출산을 해야 하는 천벌은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해소될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20세기의 인류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 pp.201-202.

모든 현대적 사회실험 중 가장 중요한 실패는 러시아 공산주의 the Russian Communes의 실패였다. (러시아혁명의 실패는 일반적으로 모든 급진파에게는 가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산주의의 실패와 직접 연관된 것은 거의 주목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로니칼하게도 가족의 폐지와 전체주의적 국가의 발달 간에 인과관계를 가정하게 했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는 나중에 러시아에서 핵가족이 재복원된 것은 인간적인 가치들, 즉 그때 급격하게 사라져 가고 있던 사생활, 개인주의, 사랑 등을 구제하려는 궁여지책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러시아혁명의 실패는 가족과 성적 억압을 제거하려는 시도의 실패라고 직접 추적할 수 있다>. 우리가 보아온대로 이번에 이 실패는 경제계급만에 기초를 둔, 남성편견이 들어 있는 혁명적 분석의 제한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 분석은 가족을 경제단위로서의 기능면에서 전면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실패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모든 사회주의적 혁명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해 왔고 또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현대의 사회주의 하에서 최초의 해방은 언제나 억압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가족구조가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노동력 또는 군대로 끌어들임으로써 가족 내부의 권력구조를 완화시키려는 사회주의자의 시도들은 개혁주의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현재 구성되어 있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진보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때로 퇴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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