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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ARCHIVES: January 2015

다문화주의와 인종차별

올해 초 노동자연대 부산지회에서 ‘다문화주의와 인종차별’을 주제로 토론했다. 그중 연사의 발제가 무척 좋아, 정리한 것을 공유하고 싶다. 들으면서 노트에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라, 연사의 실제 발제와는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경우 나의 책임이다.

참고로 이 토론은 샤를리 엡도 편집부 살해 사건 이전에 이뤄졌다.


현재 한국에 사는 이주민은 약 176만 명으로, 한국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한다. 그 중 장기거주하는 이주민은 136만 명으로, 2.7% 정도이다. 한국의 이주민은 숫자로 보면 그리 많지 않지만, 증가세는 급격하다. 1990년 당시 5만 명 정도였으니, 무척 빠른 속도로 증가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이주민은 크게 다섯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외국국적동포, 유학생, 난민.

이주노동자는 60~70만 명 정도 되는데, 크게 두 가지 제도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있다. 하나는 ‘고용허가제’로, 동아시아·남아시아·서아시아의 16~17개국 노동자들이 이 제도를 통한다. 다른 하나는 ‘방문취업제’로, 주로 중국이나 카자흐스탄에 경제적 이유 등으로 강제 이주하여 살던 동포의 2·3·4세대가 이 제도를 통한다. 그 외에 소수 ‘전문취업비자’라 하여 영어강사, 요리사 등의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통하는 제도가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제도가 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은, ‘단기순환’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5년 미만의 체류만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결혼이민자는 28만 명 정도이며, 그중 80%가량이 여성이다. 이 중에 10만 명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했고, 이들의 자녀는 약 19만 명이다. 한국 정부는 이들을 일컬어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차별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당사자들은 대개 원치 않는 용어이다.

외국국적동포는 소위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출신 동포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최근 언론과 정부에 의해 ‘엽기 살인’, ‘중범죄’ 집단인양 매도당하고 낙인찍히고 있다. 부산에 사는 사람이 엽기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해서 부산 시민 전체가 그러한 취급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인 낙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수원에서 일어난 토막살인사건의 피의자가 조선족이었다며 정부가 벌이는 일을 보면 잘 드러나는데, 그가 ‘미등록’ 체류자였다는 이유로 수원 지역의 가가호호를 전수조사하며 모든 미등록 체류자를 솎아내려 하고 있다.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일이다.

유학생은 9만 명 정도이다. 요즈음은 많은 대학에서 유학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학생으로 집계되는 사람 중 대학에 적만 두고 취업을 하기 위해 입국한 경우도 상당하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를 불법 취급한다.

난민은 현재까지 9,028명이 신청했으나, 438명만 인정받았다. 4.75%로 매우 낮은 인정률이다.

북한이탈주민(탈북자)도 이주민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하면 무조건 한국 국적을 받아야 하기에 다른 그룹과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은 2만 7,200여 명으로, 이 중 70%가 여성이며 60%가 젊은 세대이다. 2000년대 이후 북한이탈주민의 대부분은 노동자, 농민, 실업자 등의 평범한 피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그룹 중 정부 입장에서 가장 신경 쓰는 사람들은 결혼이민자로, 이들을 ‘국민 통합’의 대상으로 보는데, 이들이 통합되지 못했을 때 잠재적인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다문화 정책’이라는 용어도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소위 ‘다문화’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이 인구학적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으로, 정부가 줄어드는 출산율을 이민으로 채우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결혼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 2000년대 이전까지 이주·이민 정책이 없다시피 했던 한국의 상황이 있다. 1988년, 이전의 입국규제가 상당 부분 사라진다. 3저 호황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임금이 대폭 상승했는데, 이주노동자를 고용해 저렴하게 노동력을 쓰고자 하는 의도였다. 당시에는 관광비자로 입국 뒤 취업하는 것을 정부가 묵인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후 1993년,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렸던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된다.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연수생 제도에 격렬히 저항하고 국내·외적으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자 2004년 고용허가제가 도입되는데, 다문화 정책의 시행도 이때와 궤(軌)를 같이한다.

노무현 정부가 표방했던 다문화 정책은 ‘소수집단의 문화·언어·종교 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게 두 노선을 기본으로 했는데, 결혼이주민은 ‘동화’ 시키고 이주노동자는 ‘배제’ 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주민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훨씬 늘어갔다. 고용허가제 시행 당시 한국에는 미등록 이주민이 20여만 명이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는 이들을 전부 단속·추방했다. 그리고 입국규제를 강화해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는 관광비자조차 발급하지 않았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다문화 정책’이라는 용어 언급 자체를 꺼리는 경향이 있으나, 정책을 폐기하지는 않았고 그 내용 또한 별달리 달라진 것이 없다. 이렇듯 지난 10여 년은 한국에서 인종차별이 제도화, 체계화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미등록 체류자는 ‘불법’ 체류자가 아니다. ‘미등록(undocumented)’이라는 것은 행정법상의 문제인데 반해, ‘불법’은 형사범죄를 저지른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는가? 국제연합(UN) 등은 ‘불법 체류자’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계속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주 정책’이라는 것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불합리한 것투성이다. ‘입국규제’는 그 사람이 ‘제1세계’에서 왔느냐 ‘제3세계’에서 왔느냐에 따라 이뤄진다. ‘비자’는 또 어떠한가? 타국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이유만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 나라가 정해준 만큼만 지내야 한다. ‘정주 조건’은? 노동하러 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일해도 정주할 수 없고, 투자하러 온 사람은 돈 한 방에 정주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결국, 이주 정책의 ‘논리’라는 것은 하나같이 인종차별적이고, 계급 차별적이다.

이주민 차별이 유지되어야 할 근거라고 지배자들과 우익들이 대는 ‘논리’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로, 이민자들이 들어오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주장이 있다. 한 마디로 거짓말이다. 193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이민이 전부 ‘STOP’ 되었을 때였지만, 실업률은 역사상 가장 높은 시기였다. 반면 1950~1960년대는 실업률이 0%에 육박하는 장기호황의 시기였고 ‘완전고용’이 보장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동력은 부족했고 각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불러들이려고 경쟁했다. 이러한 역사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주장은 사람들의 오해와 선입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흔히들 100개의 일자리를 100명의 사람이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 추가로 100명이 이민 오면 일자리 수는 그대로인데 사람 수는 200명이 되므로 일자리가 부족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00명의 이민 오는 사람들이 수많은 수요를 새로 발생시켜 일자리를 더 창출한다. 일자리 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외국인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이는 과장과 왜곡에 근거하고 있다. 현실은 한국인 범죄율이 외국인 범죄율보다 훨씬 높다. 2010년 기준 전 국민 중 범죄자 비율은 3.58%이고 외국인 범죄율은 1.78%다. ‘범죄’와 관련해서, 정부와 언론은 ‘위장 결혼’이 증가하고 있어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둥 호들갑을 떨지만,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와중에도 ‘위장 결혼’이 적발된 것을 보면 2010년 30건, 2011년 69건, 2012년 72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인지 볼 필요가 있다. 미등록 이주자 20여만 명 중 10만은 고용허가제로 들어왔고, 10만은 단기 비자로 들어온 후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공장·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특별히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인가?

세 번째로, 이주민이 ‘복지 도둑’이고 이주민에 대한 복지가 ‘역차별’를 낳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없다시피 한 나라에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을 보면 황당한데, 어쨌든 사실이 아니다. 이주민 가정에 관련된 예산은 2천2백억 원 정도로 그 중 ‘복지’ 예산은 1천6백억 원 정도다. 한국의 전체 복지 예산은 100조 원이 넘으며, 이주민 가정 복지 예산은 0.2%에 불과하다. 이주민 가정이 대개 복지를 좀 더 필요로 하는 경제 사정이라는 것을 고려하기는커녕, 한국 인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보다도 예산 비중이 낮다! 게다가 정부는 ‘역차별’ 논란을 부추기며 ‘사회통합기금’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사회통합’을 위한 기금을 이주민이 직접 내라는 것인데, 이주민의 범칙금이 올랐고, 출입국 사무소의 서류 발급비용은 2014년부터 2배로 올랐다. 2

네 번째로, 이주민은 ‘문화’가 달라 어울릴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영국 국민당(BNP), 프랑스 국민전선(FN) 같은 유럽 파시스트들의 최근 ‘트렌드’이기도 한 주장이다. 요즘은 ‘인종’을 공격하는 것이 잘 먹히지 않으니, ‘문화’가 문제라는 식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주되게 ‘조선족’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문화도 고정불변하지 않고, 순수한 문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사회에서 단일한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충돌 과정에서 문화는 변화한다. ‘무슬림 문화’라고? 이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전혀 단일하지 않다. ‘고정불변한 문화’라는 주장은 결국 인종차별의 주된 논리와 맞닿는다. 인종처럼, 자신이 원한다 해서 빠져나오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배자들과 우익들이 대는 인종차별적 논리를 하나씩 살펴봤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문화주의’가 인종차별을 없앨 수 있는 전략일까? 다문화주의는 ‘서로 다른 문화공동체의 합’으로 사회를 이해한다. 그러나 사회는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흑인 내부의 계급과 백인 내부의 계급으로 나뉜다. ‘인종’ 내부의 계급적 분열을 보지 못하면, 계급 단결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인종차별이 자본주의의 필요로 만들어졌기에, 인종차별 약화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인종을 뛰어넘은 노동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 다문화주의는 이 점을 놓칠 위험이 있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하에서 노예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자유, 평등, 박애’가 외쳐졌지만, 곧장 모순에 부닥쳤다. 당시 자본주의는 ‘노예’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흑인은 제외’라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는데, 문학·예술·의학·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인종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가 만들어져야 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외지인에 대한 편견은 있었을지언정, 체계적인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3

그런데 노예제가 사라진 지금도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맹위를 떨친다. 왜 그러한가? 두 가지 잘못된 설명이 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사람들의 본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중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는 설명은 주되게 NGO들이 택하는 설명이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에 대한 ‘계몽’이 필요할 것인데, 계몽을 몇십 년째 해왔는데도 이 모양이니 결국 비관적 전망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편견 탓이든 본성 탓이든 이는 정부를 동원해서 인종차별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이미 인종차별 금지법이 있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사실은 여전히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다. 첫째로, 자본주의는 ‘만인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인종적 차이를 강조하면 자본가가 이득을 볼 수 있다. 노동계급이 서로 분열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본주의에서는 주기적인 경제위기로 인해 늘 실업이 생겨나고, 복지를 삭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경제위기 때 자본가는 구조조정을 해 실업자를 늘려야 하고, 정부는 복지재정 삭감을 해야 한다. 이때 이주민은 ‘속죄양’으로 삼기 좋은 대상이 된다. 셋째로, 이민 노동력은 자본가에게 여러모로 유용하다. 이민 노동력은 ‘유연한 노동력’이 될 수 있다. 쉽게 해고할 수 있고, 낮은 임금을 줄 수 있고, 높은 노동강도를 강요할 수 있다. 이렇게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 노동계급 간 이간질을 할 수도 있고 경제위기 때 속죄양 삼기에도 좋다.

노동계급이 투쟁할 때, 이주민 연대는 필수적이다. 많은 이들이 노동계급 투쟁과 이주민 연대를 서로 관계없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자신감이 있고 힘이 있을 때 인종차별은 줄어든다. 반대로 자신감이 없고 사기가 낮을 때 바로 옆의 이주민을 속죄양 삼으려 하곤 한다. 무엇보다, 인종차별을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의 철폐가 필요하고, 여기에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은 필수적이다.


  1. 한국에서 인종차별은 그 이전에도 만연했지만, 구체적인 제도·언론·법 등으로 뒷받침되며 체계화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부터라 볼 수 있다.
  2. 그 이전에도 이주민 서류 발급비용은 무척 비쌌다.
  3.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가 있지만, 영어로 노예를 뜻하는 단어 ‘slave’가 백인인 슬라브족에서 왔다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노예 제도는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그 근거로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