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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ARCHIVES: May 2012

밀라노 유로메이데이 집회 참가기: 유쾌하지만 언듯 느껴지는 자율주의적 분위기

유럽 여행 중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유로메이데이(EuroMayday)’ 집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유로메이데이 집회는 밀라노, 리스본, 함부르크 등 12개 유럽 도시에서 매년 5월 1일 열리는 이주노동자와 불안정 노동자의 국제 시위이다. 이번 밀라노 집회의 포스터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한 불안정 노동자, 현지 노동자, 이주노동자의 단결”을 슬로건으로 걸었고, 1천5백여 명이 참가해 밀라노 시내를 2시간 반 동안 행진했다.

한국의 메이데이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강한 비트의 힙합, 레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행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겨웠다. 참가자들의 얼굴이 무척 밝아 보였다. 스리랑카의 신생 좌파정당 ‘사회주의최전선당(FSP)’의 이탈리아 지부원들을 비롯해 여러 이주민들이 눈에 띄었고, 대부분이 불안정노동자일 청년들도 많이 참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행진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밀라노에 도착하기 전에 알아보기로는 여기서 열리는 메이데이 행사는 이것밖에 없는데, 이탈리아의 좌파 정당들의 깃발이 왜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를테면 나는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제4인터내셔널 경향의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자공산당(PCL)의 기관지를 가판에서 구입했었는데, 이들의 깃발도 행진이 시작되자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재건공산당(PRC)이나 비판적좌파(SC) 등의 정당들은 행진 시작 이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행진 대오를 한참을 헤집고 다닌 뒤에야 풀릴 수 있었다. 영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고 밝힌 한 이탈리아인 동지는 재건공산당 당원이었다. 재건공산당 깃발은 왜 보이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대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다 함께’ 행진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납득이 되질 않았다. 깃발이 있다고 해서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행진은 까이롤리 광장에서 끝나고, 광장에 여러 부스가 차려졌다. 그제서야 갑자기 비판적좌파의 깃발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다. 가판에 들러 잡지를 구입하며 물어보니 행진 때는 비판적좌파의 깃발은 들지 않고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부채 반란(RiD)’이라는 공동전선의 피켓만 들기로 결정했었다고 한다. 이유는 아까 재건공산당과 똑같이 ‘사람들과 섞여서 행진하기 위해서’라는 걸 듣고 나서, 이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 사이에 정당을 불신하는 자율주의적 경향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러한 경향은 행진 도중에 여러 번 느낄 수 있었는데, 공통의 구호는 없었고 각자가 각자의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이주민들은 이주민 차별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그 뒤에 따라오는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는 팔레스타인 해방에 관한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몇 대의 행진 차량에서는 DJ가 가끔씩 뭐라고 짧게 외칠 뿐이었는데, 사람들이 따라하지 않는 것을 봐서 구호 같은 건 아닌 듯 보였다.

이는 행진이 끝나고도 마찬가지여서, 광장에 모여서도 사람들의 발언을 들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 각자 부스를 차려 놓았고, 사람들 대부분은 광장 한가운데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운동의 전진에 과연 도움이 될까?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건 재건공산당과 비판적좌파 등의 좌파들이 이러한 경향을 추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좌파는 운동에서 주변화될 것이고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한 데다가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부디 이탈리아의 좌파 정치 조직들이 잘못된 길을 택하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내내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마냥 함께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게 했던 집회였다.


<레프트21>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