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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금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

서울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이후, 여러 언론들이 연일 ‘추락하는 교권’, ‘무너지는 학교’를 말하며 학생의 교사에 대한 폭언·폭행 사건을 쏟아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체벌이 없으면 교권이 무너지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먼저 한 가지 사실관계부터 지적해보자. 조금만 유심히 이 기사들을 읽어본다면, 정작 이 사건들은 체벌이 금지된 서울·경기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언론들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체벌이 금지되지 않았던 2006년에 제작된 동영상까지 뒤져가며 열을 올렸다.

만약 정말로 체벌금지 때문에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더라면, 언론들은 손쉽게 서울․경기에서 일어난 ‘교권침해’ 사건들을 무더기로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70% 정도의 교사가 체벌을 하고 있으며 20% 정도는 체벌을 ‘자주’ 하는(참교육연구소, 2010) 한국 현실에서, 0.1%나 될지 의문인 극소수 학생들이 교사에게 저지르는 폭력만을 부각시키며 학생 집단 전체를 싸잡아 질타하는 것을 과연 공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행태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학생인권이 얼마나 짓밟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꼭 폭력이 아니더라도, 요즘 애들 버릇없고 못되었지 않은가. 체벌이 있었을 때도 그런데, 체벌이 없어지면 그런 게 더 심해지지 않을까?’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렇듯, 질문 또한 특정한 관점을 전제하며 일정한 틀 안에서 대답이 맴돌도록 제약한다. ‘체벌을 안 하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도 안하고 ‘싸가지’ 없게 굴 텐데 괜찮을까’, ‘체벌 대신 어떤 벌을 주면 학생들이 말을 잘 들을까’ 같은 이야기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잘못된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화장품을 ‘금지’하기보다 왜 몸에 안 좋은지 ‘설명’을 해준다면?

체벌은 학생들이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교사의 지도에 따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데서 시작된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사회화가 되고 성숙한 존재가 되려면 무엇이 나쁜 행동이고 좋은 행동인지 벌과 상을 주어서 학습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강력한 교권을 통해 학생들을 잘 따르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대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다. 많은 경우 체벌은 불필요하며 강압적인 방식의 규칙과 지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16일 열린 <학생인권조례의 시대, 교사가 말하다>에서 “교칙을 바꿔야 하는데 진한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강에도 안 좋은데 그렇다고 금지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라는 생활지도부장 교사의 물음에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이렇게 답했다. “초등학교에는 화장 관련 규정이 없지만, 화장품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설명해놓은 글을 붙여놓으니 학생 중 아무도 화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청소년인권활동가는 “천연화장품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일반화장품이 피부에 좋지 않다면 천연화장품을 쓰라고 권하면 되지 않을까? 설득하고 대화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풀어야 할 문제를 놓고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방식만 고민한다면, 규제에 반발하는 학생들은 ‘싸가지’ 없게 보일 수밖에 없고 체벌의 유혹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

2010년 수도권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참교육연구소가 한 설문조사에서 체벌의 주된 이유(복수응답)로 ‘과제나 수업태도’가 56.8%, ‘두발복장문제’가 41.0%, ‘지각/결석’이 33.2%가 나왔다는 것에서도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학생은 머리카락을 길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7~8월에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일어났다. 그 중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제일 첫 번째로 내건 요구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두발자유’였다. 1980년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회사 규정에 따라 스포츠머리를 해야만 했으며, 매일 아침 회사 정문에서 경비대원들이 ‘바리깡’을 들고 두발단속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노조위원장을 했던 이갑용 씨는 “그때 우리들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 그런 것들의 상징이었다.”라고 회상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그랬고, 지금 학생들에게 그렇듯, 머리카락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결정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이다.

지각문제는 등교시간을 학생들과 논의해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등교시간이 너무 이른 학교들이 많다), 그래도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면 왜 지각을 하는지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손쉽게 때려서 해결하려 하는 건 반교육적 처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반인권적인 교칙만 바꿔도 체벌은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다.

학생은 싫증이 나도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체벌의 이유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수업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떠들어서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는 경우 말이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사의 감독 아래 열심히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여러 대안이 보인다. 예컨대 핀란드에서는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하거나 물을 먹고 온다고 해도 수업에 방해를 주지 않는 한 교사가 야단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원할 때 수업을 듣지 않고 쉬거나 다른 대체프로그램을 택할 수 있는 시간을 일정부분 보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러면 학생들이 싫은 수업을 듣지 않으려고 매번 그 제도를 사용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싫은 수업에 억지로 앉혀놓는다고 해서 그 학생이 수업을 잘 듣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오히려 잠을 자거나 주변 친구와 떠들어서 ‘교사의 분노’를 불러오는 일만 많을 것이다. 학생이 특정 수업을 싫어한다면 억지로 앉혀놓기보다 왜 그런지 이유를 고민하는 게 보다 나은 교육을 만들 수 있다.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흥미를 잃은 학생에게는 보충학습을 제공하고, 교사의 수업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교사와 교실 수를 늘려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통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고, 다른 몇몇 국가의 학교들처럼 학생들에게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수업에 흥미를 잃고 잘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에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 이야기가 되고 있지만, 학교가 계급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해 학생들에게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할 때 학교붕괴는 시작된다. 태어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설사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더라도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의욕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인가

교사들이 나서서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에서는 불합리하며 반인권적인 교칙이 학생들을 억압하고,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듣기 싫은 수업을 억지로 참고 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걸 견뎌내도 졸업 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학생들이 왜 교사의 지도를 감내하고 있어야 할까?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체벌 대신 상벌점제를 도입하느니(옳지 못한 행동을 100번 해도 옳은 행동을 100번 하면 그것이 상쇄될 수 있다는 상벌점제는 반윤리적이기까지 하다), 정학과 퇴학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느니 이야기하는 것은 소외받는 학생들을 무참히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체벌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가 아니다. 체벌금지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우리의 교육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할까’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지 <청람문화>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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