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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ARCHIVES: June 2010

지방선거 단상

지방선거가 끝났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개표 방송을 보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았고, 하루 종일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1991년 5월에 태어나 만 19세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방선거날 아침 일찍 가야할 곳이 있어서,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을 때 투표를 하러 갔다. 노인들이 많았고, 나 빼고 가장 젊어보이는 사람이 40대 정도였다. 이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대개 누구에게 투표하러 왔는지 짐작이 갔기에, 나는 징글징글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 투표하느냐를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번 선거에서 서초구 주민으로서 투표했다. 기숙사로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인데, 순전히 ‘곽노현 교육감’과 ‘노회찬 시장’을 뽑기 위해서였다. 곽노현 씨가 진보교육감 후보로 단일화된 다음날 바로 전입신고를 했다. 경선에 나온 진보교육감 중 가장 인권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그로 단일화된 것은 나에게 꽤나 기쁜 일이었다.

전입신고할 때는 기쁜 마음이었지만, 막상 선거가 다가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투표용지 8장 중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이름답게 서초구에는 ‘진보’ 교육의원 후보가 나오지 않았고, 구청장과 시의원, 구의원, 기초비례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나오더라도 찍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 투표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무효표를 만들지는 않아도 되는데.

이번 선거에서 나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게 표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노회찬 후보가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아서 한명숙 후보가 졌다며 노회찬 후보에게 심한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라 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무효표가 유효한 정치적 의견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내가 했던 고민(그것이 유치한 것일지라도)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리려면 이렇게 블로그에나마 글로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선거 전 몇몇 사람들에게 내 결정을 이야기하며 약간은 섬뜩한 농담을 곁들이곤 했다. “만약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이긴 후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전부 숙청해버릴 거라면, 나는 무효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어.” 내가 보기에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번 선거에서 보이는 행태는 이러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선거가 이번이 끝인양,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종신직이라도 보장받는양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무지한 탓인지, 나는 민주당과 국참당이 어떻게 지방정치를 바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공약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분명 약간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을 뽑으면 좀 더 살기 좋아지겠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없었다. <딴지일보>는 ‘서초민주당’을 무척이나 칭찬하던데, 나는 이들의 공약을 읽어봐도 딱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내가 서초구 주민이라기 보다는 서초구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떠날 외부인이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살던 고향에 나온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그 후보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해운대에는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가 총 3명 나왔는데, 3명 모두 당선되었다.)의 공약과 이들의 공약을 비교하며 내가 서초구로 주소를 바꾼 것을 아쉬워했다.

하여튼, 나는 무효표를 5장이나 만들었고, 그 선택을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쩌면 한나라당이 당선되는데 보탬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서초구 구청장과 시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구의원만 민주당 후보 한 명이 당선되었다.), 나는 이 선택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낫다고 판단했기에 이렇게 하였다.

좋게 생각해서 지방선거가 지방정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선거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012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이번처럼 민주당이 승리한다고 하자. 과연 그 승리가 천년만년 계속될까. 대안 없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심판을 위해’ 찍어달라고 해서 얻은 표는 쉽게 가버리기 마련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인 선거 때조차 ‘정권 심판’ 외에는 민주당을 왜 찍어야 하는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들이 또 다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빼앗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되면서 한국 정치는 점점 더 보수화될 것이고,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무효표를 만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쁜 것은, 곽노현 후보가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인천과 부산에서 진보교육감 후보가 2위로 떨어진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6명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다는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를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한편 든다. 내가 진보교육감 당선을 바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인데, 어쩌면 이들의 당선이 내 바람에 오히려 적(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이다.

학생들은 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학부모들은 학생인권조례에 딱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학부모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자신의 자녀가 자퇴하도록 허락해줬거나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이 말은, 교육감에게 학생인권조례가 후순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 세력은 별로 영향력이 없고, 반대하는 세력의 힘은 막강하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진보교육감’ 하나만 믿고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압박 없이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힘든데, 학생들은 “이젠 되겠지”라고 말하며 “언제 되나요?”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초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던 경기도에서 숱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가 있는데, 수원지부 게시판에는 매일같이 “학생인권조례가 언제 만들어지나요?” 따위의 글이 올라오는 실정이다.

학생들이 각 교육청에 그런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끼고 학생인권조례를 서둘러 추진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별로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진보교육감의 당선이 청소년들의 행동을 약화시키지는 결과만 낳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대다수 청소년들이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육감들이 압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이 할 일이겠지만.) 이게 노파심이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지방선거 후에 드는 잡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