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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강연: 억압과 자유 그리고 인권

그저께 오랜만에 박노자 씨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강연 원고가 올라온 것을 보고 강연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신청하기에 너무 늦지 않았나 했는데, 다행히 신청할 수 있었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꽤 기대를 했었는데, 대개는 이미 알던 내용이라 조금 실망. 강연을 듣고 나서 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박노자 씨의 강연과 크게 관련없는 내용도 많다.

강연에서 ‘보편적 인권’이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무척이나 근대적인 개념임을 이야기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더라. 고대와 중세의 동서양의 여러 사례를 들어가면서. 들으면서 ‘당연한 사실을 왜 그리 강조하시는 거지?’하고 생각했는데, 강연이 끝나고 나서 질문시간에 꽤 많은 분이 그 점이 흥미로웠다고 하시던 걸 보면서 그것이 꼭 당연한 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인권은 ‘유럽’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특수한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 역사를 따져보면, 결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인권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질 때를 전후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이 “인권은 보편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권은 원래 ‘기독교적 신’과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운 개념이었다. ‘천부인권’에서 ‘천’은 바로 기독교적 신을 뜻한다고 볼 수 있고, 전능한 신이 부여한 것이기에 인권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에서 특정한 종교의 신을 토대로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세계인권선언’은 ‘국가 간의 합의’를 통해 인권에 보편성을 부여한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기까지 국가 간의 수많은 토론과 투표가 있었다.) 사실, 그 이후에도 ‘인권의 보편성’을 논증할만한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명쾌한 답을 보지 못했다.) 세계의 종교와 문화에서 ‘보편적인 인권’의 기초가 될만한 요소를 찾아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인권 개념이 유용하기에, 보편적인 진리라 여겨지며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 이는 국제법과 같은 제도를 통해 뒷받침되어 ‘보편적’인 것이 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힘의 논리 때문에 인권에 관한 국제법이 무시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법이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며, 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명확해진다. 인권의 보편성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인권의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는 제각기 생각이 다르다는 것. “인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일할 권리는 없어.” “인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동성애자들이 결혼할 권리는 없어.” “인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머리카락 형태를 결정할 권리는 없어.” 이러한 상황인데 설사 인권이 보편적임이 증명된들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박노자 씨가 강연에서 누차 강조하신 대로) ‘투쟁’이다. ‘투쟁’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분들이 적잖이 있겠지만, 인권의 역사에서 ‘투쟁’없이 쟁취된 인권은 없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고, 차티스트운동이 있었고,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이 있었고, 반문화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투쟁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인권’이 있다. 인권은 ‘투쟁’과 ‘합의’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권리가 인권이고 어떤 권리가 인권이 아닌지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고 보는데, 인권 이론가들의 논의에서 몇 가지 기준을 빌려 오자면, 1) 소위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2) 다른 인권의 본질적인 요소를 침해하지 않을 것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명쾌하지 않다고? 원래 명쾌한 것이란 잘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학자들의 논의는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깊지만,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

앞서 말했듯 원래 ‘인권’이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특수한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인권은 근대의 쌍생아”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데, 서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둘은 꽤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박노자 씨가 강연에서 맑스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듯, 인권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났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권이 (대개는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며 발전해온 동시에, 자본주의와 그의 실천자들(국가, 기업)의 억압능력 또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억압능력’이 발전하면서, 현재 ‘보편적 인간’의 이념은 국가와 자본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다. ‘종족 계급(ethno-class)의 출현’이 대표적인데, 자주적인 개발권을 박탈당한 ‘주변부 국가’들의 인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국제적으로 이동하면서 국적/종족별로 특정한 업종을 전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파키스탄/네팔 출신의 남성들이 한국과 일본의 공장노동자 일을 맡는 것, 필리핀인 여성이 노르웨이에서 ‘하녀’의 대명사처럼 된 것.) 이들은 불안정한 최하층 계급을 차지하면서, 생존권과 여타 수많은 인권을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결국, 이제는 인권을 위해 자본주의의 극복이 필요한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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