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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눈으로 입시경쟁 바라보기

입시경쟁, 그 끔찍한 이름!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구나. 나도 자유로운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현실은 너무 달라. 상상 이상으로 너무 달라. 공부 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 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 공부, 공부, 공부. 좁디좁은 교실에 선풍기 4대 히터 2대. 40명이 넘는 아이들…. 같은 곳에서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 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 법’.”

— 2007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中

매년 들려오는 청소년들의 ‘성적비관 자살’ 소식. 더 이상 이런 소식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 때문에 자살하고 있죠. 사실 자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자니 왠지 혼자서 호들갑을 떠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은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끔찍한 일이에요. 굳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한국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입시경쟁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다들 알고 계실 거에요. 다른 나라 학생들은 오전 8시에 등교해서 오후 1시에 집에 가는데, 오전 7시에 등교해서 오전 1시에 집에 가는 한국 학생들…. 2003년 1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환경이 아동(유엔은 ‘아동’의 개념을 18세 미만인 자로 규정하고 있어요.)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개선하라고 권고했죠.

한국의 학교들은 입시준비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교육을 위해 입시가 있는 게 아니라 입시를 위해 교육이 있는…. “경쟁에서 이겨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라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급훈으로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말이 버젓이 걸리는 학교. 그러고도 사람들은 “공교육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따위의 소리를 하곤 합니다. 이미 ‘교육’은 죽어버리고 없는 데,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된다는 그 ‘공교육’이란건 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경쟁력’을 생각하기 전에, 그 속에서 죽도록 불행한 청소년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입시경쟁은 학교 내 다른 인권침해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까 머리는 무조건 짧게 깎고, 공부 못하니까 맞아야 하고, 휴대폰은 압수!” 이런 식이죠. ‘강제’적인 ‘자율학습’의 문제도 있겠네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강제자율학습’만 문제인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사라지지 않은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자율학습’만 ‘진짜 자율’이 된다고 해서 과연 청소년들이 강제적인 학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에요. ‘자율학습’이 ‘정말로 자율적인’ 일부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그들 중 방과 후에 진정 입시공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청소년이 얼마나 되나요? 방과후에도 청소년들은 여전히 학원을 전전하고, 결국 그것은 학교에서의 ‘강제자율학습’과 마찬가지이죠. 어느 누구도 좋아서 자발적으로 입시학원에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입시경쟁 속에서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강제학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인생은 끝없는 경쟁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러한 입시경쟁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도 많아요. “모두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입시경쟁이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주장하며, 청소년기의 ‘짧은 순간’을 희생해 입시경쟁에 ‘헌신’할 것을 요구해요. 그러나 이는 기만일 뿐입니다. 입시경쟁에는 늘 ‘패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입시경쟁에서 ‘승리’한 청소년들, 소위 명문대에 들어간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볼 수 있나요? 성적이 상위권인 청소년들은 대개 가정과 학교의 요구와 압박으로 인해 입시경쟁의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많죠.

그 모든 전쟁에서 너희들이 만든 그 모든 전쟁에서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다쳐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얻었지

폐품이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고마운 자유도 얻었지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 정윤경, ‘시대’ 中

게다가, 중요한 것은 성적이 상위권인 청소년들도 입시경쟁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고 직업을 갖게 된다는 것이에요. 소위 말하는 ‘돈 많이 벌고 권력있는’ 직업을 갖는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고 좋아질 수 있을까요? 비록 그들 대부분이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이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도,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입시경쟁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는 ‘노예의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 큰 불행이죠. 입시경쟁 시스템 속에서 ‘승자’는 없어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

더 뻔뻔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인생은 어차피 끝없는 경쟁이다. 무조건 참아라.” 분명 한국 사회에는 입시경쟁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쟁들이 존재합니다. 취업경쟁이라던지, 직장 내 승진경쟁이라던지…. 하지만 그 경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쟁을 하려 했던 것 아니었던가요? 끝없는 경쟁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런 경쟁은 그만둬야 합니다. 참아야 할 게 아니죠. 신체의 고통을 계속 참고만 있는다면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처럼, 경쟁의 고통 또한 마찬가지에요.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노예’가 되어버린지 너무 오래라 경쟁을 왜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듯합니다.

입시제도를 손보면 괜찮아질까?

어떤 사람들은 입시제도를 조금 손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수를 늘리면 된다느니, 내신위주로 하면 된다느니, 수능만으로 대학가게 하면 된다느니, 대학에 자율로 맡기면 된다느니 하는 사람들 말이죠. 지난 수십 년간 입시제도를 얼마나 많이 ‘손봐’왔는지! 그런데 어째서 입시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기만 하는거죠?

누구나 ‘명문대’에 가려 하고, ‘명문대’에 가지 못하더라도 ‘조금 더 나은 대학’을 가려고 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명문대’니 ‘더 나은 대학’이니 하는 건, ‘그 대학의 수업이 얼마나 좋은가’ 같은 것이 아닌, ‘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는가’ 따위로 따져요. 그러니 입시제도를 어떻게 손보든, 뭔가 소용이 있기는 커녕 더 치열해지기만 하는 거죠. 대학에 들어가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명문대’에 들어가는게 어려운 거니까. ‘명문대’의 수는 한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모두들 ‘명문대’에 들어가고 싶어하니 말이죠.

그러니까 ‘입시제도를 어떻게 손보는가’가 중요한게 아니에요. 입시경쟁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지,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 ‘어느 정도 할만한’ 입시경쟁 따위는 있을 수가 없어요. 경쟁이 치열해질 수 밖에 없죠.

대학평준화? 좋은 방법이긴 하다만, 글쎄….

입시경쟁을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대학을 평준화시키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든 대학이 같은 교육여건을 갖추게 하고, 자격시험에서 일정 수준 이상만 넘으면 어느 대학이나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거죠.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의 대학들이 이처럼 평준화되어 있어요. 대학입시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것이니, 입시경쟁은 없어지겠죠. 여태까지 나온 입시경쟁에 대한 ‘해결책’들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해요.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어요.

첫 번째로, 특정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 직업 간의 임금이나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돈 잘 벌고 권력을 얻기 쉬운’ 특정한 학과에 많은 학생들이 몰릴 가능성이 크죠. (예를 들어 의과대학이나 경영대학.) ‘입학은 자유지만 졸업은 어렵게’ 만들어서 그런 문제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졸업을 위한 살인적인 경쟁을 불러 오지 않을까요? ‘대학평준화’를 하는 것과 동시에, 직업 간의 임금과 권력 격차를 줄이는 ‘직업평준화’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죠.

두 번째로, ‘엘리트 학교’가 만들어질 경우. 프랑스의 경우 대학(Universités)이 평준화되어 있긴 하지만, 그랑제꼴(Grandes écoles)이라고 해서 특정 분야(공학, 경영)의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따로 있어요. 만약 대학이 평준화되더라도 이러한 ‘엘리트 학교’가 생긴다면, 과연 입시경쟁이 사라질까요? 이러한 ‘엘리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또다시 시작되겠죠. 보나마나 ‘엘리트 학교’들이 다루는 분야는 공학과 경영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분야들로 확대될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대학평준화가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 또한 문제죠. ‘(이미 시행되고 있는) 고교평준화가 나라를 망친다’느니 하는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평준화에 반대할 것이란건 뻔한 사실이죠. 만약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게 과연 문제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요? 아니,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긴 할까요?

중요한 건 청소년의 직접행동

시험 = 굴종, 사회적 지위향상, 위계적 사회.

우리는 사람이 구조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구조가 사람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바라는 생각을 실천하라.

나를 해방시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게.

내 똥구멍이나 개혁해라.

— 68혁명의 낙서들

앞서 말했던, 대학이 평준화된 나라 중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68혁명’이 시작된 나라입니다. ‘68혁명’은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질서, 사람들의 창의성을 빼앗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청소년과 청년들의 반란”이었어요. 1968년 5월,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외쳤죠. 사회의 모든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것들을 허물기 위한 혁명.

비록 ‘68혁명’은 그들이 원하던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로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대학평준화도 그 중 하나에요. 그 당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국유화하라”고 주장하며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 끔찍한 입시경쟁을 없애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야 해요. ‘남이 바꿔주는’ 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수많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나서서 행동한다면, 꼭 대학이 평준화되지 않더라도, 입시경쟁은 없어지겠죠. 하지만, 청소년들이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갖겠다는 욕망에 빠져 ‘노예의 길’을 택한다면, 경쟁에서 낙오돼 비참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다면, 입시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질 것이고,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청소년들의 소식도 점점 늘어만 갈 겁니다.

거리로 나와 저항하는 청소년만이, 쇠사슬을 끊을 수 있어요.
청소년의 직접행동만이, 입시경쟁을 없앨 수 있습니다.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서태지, ‘교실 이데아’ 中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메이데이, 2009)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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